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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풍경과 추억 (2) - 시대의 면죄부, 거실과 서재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9. 1. 15.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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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거 한옥 구조에서 '방'이라 부르던 공간은 아파트가 나타나면서 '실'이라는 이름으로 변하였다. 남성의 공간이었던 사랑방은 일제 강점기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서양식 주택에서 잠시 없어졌다가 응접실로 변하더니 오늘날 서재라 부르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지금까지도 서재는 거실에 흡수되는 경향이 강하다. 보통의 평범한 시민들은 자녀의 방을 마련해 주기도 바빴으니, 서재는 고급 단독주택에서나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토요일의 오전 근무가 사라지면서, 그리고 남성들이 퇴근 이후의 자신의 삶을 중시하기 시작하면서 일반 아파트에도 서재라는 독립된 공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근래의 신축 아파트에 등장하기 시작한 '알파룸'을 이용하여 서재라는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서재를 두는 또 하나의 방법은 자녀의 방 하나를 서재로 쓰는 것이었다. 이는 자녀의 수가 크게 줄어들었기에 가능해졌다. 예전처럼 아이를 기본적으로 둘 이상 낳던 시대에는 공간 부족으로 인해 거실을 서재로 같이 이용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방 하나를 따로 내어서라도 서재라는 개인 공간을 갖추려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서재에 대한 욕구와 함께, 아파트 분양 단계에서 방의 벽을 없애 거실을 확장할 수 있는 옵션 또한 늘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 지어지는 아파트나 단독주택을 보면 거실을 넓히려는 움직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서재와 같은 개인 공간을 중시하는 경향도 여전하다. 거실 같은 공공의 공간이 아니라 서재 같은 개인의 공간에서 개인 생활을 즐기려는 움직임 또한 확고한 것이다. 사춘기가 시작된 아이들은 누구나 오갈 수 있는 거실에서 무언가를 하기보단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채 생활한다. 자신만의 시간을 중시하는 어른들 또한 자신만의 방을 갖길 원하고 있다. 


이처럼 서재 같은 개인의 공간을 중시할수록 공공의 공간인 거실은 활용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다만 손님을 자주 초대하는 가족이나 자신만의 공간을 중시하되 공동체 생활과의 균형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가족에겐 거실이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거실은 과거의 사랑방과 과도기의 응접실이 했던 역할을 해주어야 했다. 차를 마시고 카드놀이를 하기 위한 테이블을 중심으로 그 뒤쪽에 안락한 소파를 배치하고 그 앞으로 TV를 두며, TV 장식장 옆으로 화병과 턴테이블을 전시하여 가장과 안주인의 취향을 드러내고자 했던 그 공간 말이다. 



2.

당시 사람들은 거실에서 문학과 미술과 음악을, 즉 문화를 향유했다. 그 문화는 TV의 쇼프로그램과 간식거리와 소소한 가족사로 채워지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렇기에 정겨웠고, 또 모두가 모일 수 있어 의미 있었다. 거실은 그런 공간이었다. 모두가 모이는 공간. 그래서 모두에게 보이는 공간이었다.


거실이 아파트에서 가장 세련된 공간으로 치장되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방문하는 모두에게 보이는 곳이었기에 적당한 장식이 필요했다. 80~90년대의 아파트 거실은 장식이 지나쳐 과시성이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었다. 당시 그런 과시는 일반적이어서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도 거실 천장에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거실 장식도 크기를 중요시하여 대형 괘종시계를 걸어두는 경우가 흔했고 커다란 액자에 가훈이나 정물화를 담아 걸어두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지금도 TV는 커지는 경향이 있지만 과거엔 실용성보다 장식성에 더 무게를 두었다. 당시 TV 드라마는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수시로 비춰 주었다. 거실은 거실[居室]이라는 단어 그대로 그곳에 '머무른 채' 웃고 떠들고 눈물짓는 공간이었다.


이제 거실이 그런 지위를 향유했던 시기가 지나가고 있다. 서재를 위시로 가족 내에서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경향이 지금보다 더 늘어난다면, 지금까지 면적을 늘려 왔던 거실은 향후 줄어들게 될지도 모른다.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90년대만 해도 거실에 꼭 놓여 있었던 티테이블, 즉 탁자가 상당수 사라졌다. 차와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던 거실의 공간이 부엌으로 흡수된 것이다. 


사실 거실의 소파는 이야기를 나누기에 불편했다. 소파를 마주 놓을 공간이 없었던 작은 규모의 거실에서 특히 더 그러했다. 소파에 앉은 채로는 상대방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소파는 그 위에 앉기보다는 등을 기대는 등받이 역할로 쓰일 때가 많았다. 우리나라 특유의 좌식 생활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탁자에 빙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식사를 할 때가 많았는데, 이제 그 공간이 부엌으로 온전히 옮겨가게 되었다. 


오늘날 거실의 책장은 서재로 이동하고 있으며 TV의 기능은 개인 컴퓨터와 휴대전화로 옮겨가고 있다. 그리하여 거실은 아파트와 단독주택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쓰임이 가장 적은 공간이 되어 가고 있다. 부엌의 활용도가 높아지는 경향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거실을 거의 부엌처럼 활용하는 가정도 늘고 있다.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 온전한 거실은 사라지고 거실과 부엌이 하나로 합쳐진 새로운 공간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한정된 공간에서 공동의 거실과 개인의 방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도 적지 않은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3.

이러한 시대상에서 우리 가족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아파트의 작은 거실엔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많은 전구가 끼워져 있었고 다이얼을 돌려 불의 밝기를 조절할 수 있었다. 전구는 불필요하게 많이 달려 있어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 전구 몇 개를 항상 빼놓아야 했다. 부엌의 전등은 신기하게도 높이 조절이 가능했다. 전등을 잡아 손으로 내리면 전등의 목이 죽 늘어났다. 거실엔 소파와 탁자가 놓여 있었고, 탁자 옆엔ㅡ가장의 전용석이었지만 내가 장난감으로 이용했던ㅡ회전의자가 놓여 있었다. TV 장식장엔 수석과 매병 모조품이 올려져 있었고 그 옆엔 전축과 클래식 모음집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쪽 벽엔 '가화만사성'이라 적힌 커다란 액자도 걸려 있었다. 마침 방에는 피아노도 있었으니, 어머니는 그 거실에 앉아 차 한 잔을 하며 자녀가 선사하는 피아노 연주를 감상하길 바랐다. 


당시 시대가 국민들에게 제시했던 행복한 가족상이란 그런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배불리 식사를 한 뒤 거실에 앉아 TV를 켜둔 채 어린 자녀들을 바라보며 '행복'이란 감정에 물들었으리라. 비록 그 감정과 거실의 환영은 일시적인 것으로 드러났고, 그리하여 나는 때때로 그 환영을ㅡ심지어 지금도ㅡ원망하곤 하지만, 시대가 일방적으로 제시했던 시대상에서 벗어나기란 그 누구도 쉽지 않았다. 나의 부모님마저도, 그리고 나 역시도. 


부모님의 생각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낄 때가 있다. 변화시키고 싶다고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날 강압적으로 변화시키길 원하지 않았듯, 부모님 역시 누군가 자신을 변화시키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시대는 형식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당시 거실의 화려한 장식이 지금은 과시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더라도 난 그때의 거실을, 당시의 문화를 저급하다 말할 수 없다. 그 문화의 영향 아래 있던 사람들에게,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면죄부를 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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