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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의 구조, 스테이크 나이프, 그리고 어머니의 등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9. 1. 1.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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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말에 서울 상봉동의 한 식당에 찾아갔다. 식당 이름은 오스테리아 주연. 먼저 나온 파스타에 한창 집중하고 있을 때 웨이트리스가 조그마한 스테이크를 가지고 왔다. 메뉴 이름은 '상봉 스테이크'. 트레이에는 세로로 썰려 있는 스테이크와 조그마한 칼이 놓여 있었다. 스테이크를 미리 잘라놨는데 굳이 왜 나이프를 둔 것일까 생각하다가 나이프를 눈여겨 보게 되었다. 한눈에 봐도 평범한 나이프가 아니었다. 


그 칼은 칼날과 손잡이가 모두 스테인리스로 되어 있는, 우리가 흔히 보곤 하는 일반적인 스테이크 나이프가 아니었다. 손잡이는 나무로 되어 있었고 볼스터는 황동으로 보였으며 볼스터 옆면에는 브랜드를 나타내는 작은 장식이 끼워져 있었다.


그릇에 정성을 기울이는 식당은 간혹 있지만 손님에게 내주는 숟가락이나 칼에 정성을 기울이는 식당은 그다지 많지 않으니, 그것 하나로 이 식당이 특별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2.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식탁에서 음식을ㅡ가위가 아니라ㅡ칼로 써는 걸 근사한 일로 여겼다. 테이블 위에 칼을 올려져 있다는 건 세련됨을 뜻했다. 지금은 워낙 식문화가 다양해졌기에 스테이크를 특별한 음식으로 여겨지도 않고 식탁에서 칼로 고기를 써는 일을 우아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떤 이들은 고기 써는 일을 귀찮게 여기기도 했으니 이제 스테이크도 썰린 채 서빙되곤 한다.


시절이 그러하니 카빙, 즉 커다란 고기를 잘라 손님에게 대접하는 일은 거의 볼 수가 없다. 주방과 거실이 아예 분리되어 있는 전통 한옥은 물론이고, 주방은 거실에서 되도록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가 반영된 아파트 구조 덕분에 오랫동안 남자들은 주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으며 잘 보이지 않는 그곳에 굳이 들어가 보지 않았고 한편으론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런 변화가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칼, 나이프>의 저자인 팀 헤이워드는 중고품 가게에서 발견한 낡아빠진 카빙 나이프를 바라보며 "카빙 나이프는 우리의 문화적 상실을 나타내는 가장 유감스런 상징일지도 모른다"[각주:1]고 술회했다.  



3.

사라진 것이 카빙 나이프뿐일까? 식사를 마친 후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자 했을 때 어쩌면 우리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어머니의 등을 보며 고마움이 아니라 불편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갈등 그 자체뿐만 아니라 내면에서 갈등이 일어나게끔 만드는 원인조차 싫어할 정도로 이기적이므로. 그래서 설거지하는 어머니의 등을 바라보며 도와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하다가, 굳이 '내가 TV를 봐야하는' 그 시간에 설거지를 하여 자신을 갈등에 빠지게 만드는 어머니를 미워하게 되었고, 결국엔 거실에서 주방이 아예 보이지 않도록 구조와 인테리어를 바꾸어버렸다. 마지막 남은 한 가지, 시끄러운 설거지 소리는 TV의 볼륨을 키워 해결할 수 있었다. 모든 걸 해결한 뒤 우리는 거실 쇼파에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오랫동안 식탁은, 그리고 집안일은 누군가가 만든 결과물의 차지였다. 어쩌면 우리가 삶에서 과정이 아닌 결과만을 중시하게 된 것엔 그런 식의 영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시대가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주방은 이제 거실 못지 않은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주방은 단순히 넓어지는 걸 넘어 거실을 넘보기 시작했다. 아파트 건설사들의 안내책자에서 '대면형 주방'이라는 홍보 문구를 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가 노력만 한다면, 휴지시킨 고기를 카빙 포크로 찍은 뒤 카빙 나이프로 잘라 내고는 그것을 접시에 담는 모습을 아파트의 식탁에 앉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 그런 '쇼'는 여러 명의 셰프들을 동시에 고용할 수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특별한 날 고급 레스토랑에 앉아 셰프가 고기를 익히고 자르는 모습을 바라보며 '역시 비싼 곳은 다르구나!' 하며 감탄한다. 집안에서 그런 일을 해주는 있는 셰프의 존재를 잊어버린 채. 어쩌면 근래에, 비록 소수에 불과할지라도, 우리는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주방의 일을 되찾게 될지도 모른다.



4.

"이거 스테인리스인가요?"


웨이트리스가 다가오자 난 은색의 스테이크 나이프를 집어들며 물었다. 식탁에 처음부터 놓여 있던 숟가락 등의 식기구가 은인지 스테인리스인지를 놓고 아내와 논쟁을 벌였지만 답이 나오지 않아 물어본 것이었다.


"모르겠는데요." 웨이트리스는 다소 놀란 눈치였다. 그때 내겐 어떤 기대감이 끓어오르고 있었던 것 같다. 주변에 이 정도로 신경을 쓰는 주인이라면 다른 것들에도 신경을 썼을 거라는 환상. 어쩌면 식기구들이 스테인리스가 아니라 은일지도 모른다는 환상. 그 환상은 스테이크와 함께 나왔던 스테이크 나이프로 어느 정도 이루어진 셈이다.


웨이트리스가 자리를 비우자 아내가 내게 속삭였다.


"저분한테 '올해의 가장 어이없는 질문'을 뽑으라면 오빠의 방금 그 질문이 올라갈 거야."


오스테리아 주연, 이탈리아 음식점. 서울시 상봉동, 2018.12.31.


김동기 셰프가 조리한 오스테리아 주연의 '상봉 스테이크'. 스테이크 나이프도 함께 나왔다. 프랑스 라귀올 스타일의 레클레어 440 시리즈였다. 2018.12.31.



  1. 팀 헤이워드 저, 김수연 역 <칼, 나이프 KNIFE> (그린쿡 2017), 17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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