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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와 관입, 성질 급한 자들의 형상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8. 12. 26.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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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제 식구의 집들이 차 들렀던 영등포의 신혼집에는 색채와 광택이 범상치 않은 냄비 하나가 식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냄비 안에선 버섯과 녹색 채소를 넣은 요리가 끓고 있었고 그 냄비 옆면에는 기다란 형태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난 냄비가 참 예쁘다고 언급한 뒤 옆면에 스티커가 붙어 있다고 말했다. 스티커를 떼어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뜻이었다. 내 말은 들은 또 한 명의 처제는 신혼부부가 허세를 부리는 것이라 장난스레 말했다. 난 무슨 소린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말을 잘못 알아들은 건가, 뭘 잘못 알아들은 거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스티커에 적혀 있는 게 상표명이란다. 이야기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 브랜드를 알고 있는 듯했다(난 지금도 그 상표명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처제도 알고 있는 걸 보니 꽤 유명한 회사인 것 같았다. 나름의 주부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내가 오히려 모르고 있었으니, 처제는 나를 향해 형부는 왜 이렇게 모르는 게 많냐고 타박하고는 생글거렸다.



2.

브랜드는 잘 모르지만 나 역시 그릇에는 꽤 관심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커피를 자주 마시다 보니 특히 컵에 관심이 많은 편이지만 요리도 종종 하다보니 음식을 담을 예쁜 그릇과 요리를 도와줄 조리도구에도 관심을 많이 두고 있다. 


몇 해 전 일본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 요미탄에 위치한 도자기 공방에 들른 적이 있다. 그때 꽤 오랜 고민 끝에 몇 개의 그릇을 구입해 들고 왔다. 어렵게 가져온 그릇이 행여 깨질까 조심히 사용했는데도 어느 순간 그릇 하나는 이가 나가버렸다. 


컵에도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어느날 아내는 오키나와에서 사온 컵에 금이 갔다고 말했다. 그 전날까지 멀쩡히 사용하던 컵에 금이 갔다고 하여 보니 정말 갈색의 기다란 실금이 나 있었다. 그런데 물을 담아 두어도 컵에서 물이 새지는 않았다. 어찌된 일일까. 어쩌면 태토에 금이 간 게 아니라 관입이라 부르는 현상이 일어난 것 아닐까.



3.

도자기는 소재에 따라 크게 도기와 자기로 나눌 수 있다. 통상 자기는 도석을 사용해 만들고 손가락으로 튕기면 맑은 소리가 난다. 반면 도기는 도토라는 흙을 사용해 만들고 손가락으로 튕기면 둔탁한 소리가 난다. 우리가 오키나와 요미탄 도자기 마을에서 사온 그릇은 도기 혹은 반자기였는데, 도기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와는 달리 수분을 잘 흡수한다는 것이었다. 


도기는 그 자체로는 조직이 치밀하지 않아 물을 잘 흡수하므로 유약을 발라 표면을 유리질로 만드는데, 제조 방식이나 유약의 두께에 따라 성질에 차이를 보인다. 그 탓에 어떤 도기에는 때로 관입이라 부르는 현상이 일어나곤 한다. 


관입은 그릇 표면에 난 가느다란 틈을 따라 물이 드는 현상을 가리킨다. 그릇의 태토와 그 표면에 바른 유약은 수축률에 차이가 있는데, 이 때문에 도자기를 구운 뒤 식힐 때 겉에 바른 유약이 갈라지게 된다. 이렇게 생긴 틈을 빙렬 또는 식은태[각주:1]라 한다. 식은태가 발생한 그릇에 색이 있는 음식을 담으면 갈라진 틈으로 음식의 색이 스며들게 된다. 이것이 관입이다. 그런고로 컵에 평범한 물을 담아 마시는 동안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유약의 틈이 내가 커피를 담아 마시기 시작하자 갈색으로 물들기 시작하였고 그제서야 우리의 눈에 띈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주방 그릇들의 관리법에 대한 책을 출간했던 히노 아키코 씨는 도기에 관입이 생기는 걸 피할 수 없다고 썼다. 도기에 관입이 생기는 걸 막고자 도기 사용 전에 도기를 쌀뜨물로 한 번 삶는 관리법이 퍼지고 있는데, 히노 씨는 쌀뜨물로 삶는다 해도 관입이 발생하는 걸 막을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틈으로 쌀뜨물이 들어가 곰팡이를 유발할 수 있으므로 권하지 않는다고 썼다. 


그런데 질그릇은 이야기가 다르다. 질그릇 역시 도기처럼 표면에 금이 생기는데, 히노 씨는 질그릇을 쌀뜨물에 삶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도기는 곰팡이 문제가 있으므로 피해야 한다고 썼다. 그런데 아쉽게도 질그릇은 왜 곰팡이 문제에서 자유로운지 서술해 놓지 않았다. 


추정해보자면, 애초에 직화 용도로 사용하는 질그릇은 열을 가하는 과정에서 매번 소독이 되지만, 도기는 그저 음식을 담는 용도로만 사용하기 때문에 곰팡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는 것 같다. 물론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도기는 애초에 열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도기는 열에 취약하여 직화가 불가능함은 물론 직사광선에 말리는 것조차 피해야 한다. 따라서 틈으로 들어간 쌀뜨물을 빠르게 건조시킬 수 없고 이는 곧 곰팡이 발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반면 질그릇은 직화가 가능할 뿐더러 직사광선 아래에서 건조할 수 있기에 틈으로 들어간 쌀뜨물을 빠르게 건조시킬 수 있고 따라서 곰팡이 문제에서 보다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질그릇의 일상 관리법에 "해가 잘 드는 장소에 두어 바짝 말리라"[각주:2]는 설명이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5.

난 아내가 금이 갔다고 말했던, 혹시나 관입 현상이 일어난 게 아닐까 추정했던 그 컵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금이 간 부분을 잡고 살짝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그 부분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미미하게 움직였다. 저런, 이건 유약에 생긴 틈이 아니라 태토가 갈라진 흔적이었다. 커피를 마시겠다며 그 컵에 뜨거운 물을 여러 차례 부은 적이 있는데 어쩌면 그 탓일지도 몰랐다. 갑자기 들어온 뜨거운 물로 인해 불규칙적인 열팽창이 일어나 금이 가버린 것이다.



6. 

그러고 보면 참 비슷한 것들이 많다. 살도 갑자기 부풀면 트기 마련이고 유리 그릇도, 칠기도 갑자기 뜨거운 것을 담으면 깨지거나 금이 가 버린다. 우리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은가. 갑작스레 뜨거운 화를 담으면 마음에 병이 생긴다. 해결 방법은 세 가지다. 온도를 천천히 높이거나, 가열해도 이상이 없는 질그릇이 되거나, 아니면 애초에 온유한 것만을 담아두는 그릇으로 태어나거나. 세 번째는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불가능해 보이고, 첫 번째는 외부의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 상처가 난 듯 바닥에 진한 금이 가 있지만 그를 쌀뜨물로 메운 뒤 다시 자신을 데울 수 있는 질그릇의 형상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런 질그릇도 첫 사용부터 급격히 강불로 가열하면 안 된다. 중불로 은근히 가열하는 길들임 과정 없이 급격히 가열해 버리면 질그릇의 바깥 면만 빠르게 데워진 탓에 안팍에 팽창률 차이로 질그릇이 깨져버릴 수 있다. 이러한 깨짐과 깨어짐이 성격 급한 사람들의, 바로 나의 영원한 숙제이다.


관입 현상이 아닌지 의심했었던 컵의 실금. 컵은 일본 오키나와의 그릇 판매점에서 구입했다. 2018.12.26.


위의 컵과 같은 곳에서 구입한 또 다른 그릇. 식은태가 자잘하게 나 있는 게 보인다. 서울, 2018.12.26.



  1. 식으면서 생긴 태(모양새)라 하여 '식은태'라 부른다. 고려청자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국보 제68호 "청자상감 운학문 매병"에도 표면 전체에 식은태가 나 있다. [본문으로]
  2. 히노 아키코 지음, 윤은혜 옮김 <오래오래 길들여 쓰는 부엌살림 관리의 기술> (컴인 2017), 75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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