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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팥죽, 아내의 퇴근, 그리고 연대의식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8. 12. 23.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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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내는 요즘 퇴근이 늦다. 연말에 일이 몰린 탓에 저녁 10시가 돼야 퇴근을 하곤 한다. 한번은 요즘 일이 너무 힘들다며 울기도 했다. 난 너무 많은 책임감을 떠안을 필요는 없다며, 일은 다른 직원들에게 맡기고 일찍 휴직할 것을 권유했지만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아내는 쉽게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이 좋은 사람들의 딜레마다. 때때로 우리는 왜 나쁜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것 같은가, 하는 의문을 품는다. 단순히 느낌 탓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마음가짐과 그에서 비롯되는 태도에는 좋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책임감과 양심, 죄의식은 좋은 사람들의 특질인데, 이런 도덕률은 때때로 우리의 정신에 압박의 굴레를 씌운다. 그러다 도가 지나치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부여한 도덕이 아니라 타인이 부여한 도덕과 가치에 갖혀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니체가 도덕을 '귀족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으로 구분한 것엔 지금도 유효한 면이 있다. 그래서 아내가 힘들다며 눈물을 흘렸을 때 나는 그 눈물이 나약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의 그런 소망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었다. 니체는 귀족의 도덕 혹은 주인의 도덕이라 불리는 것을 주창했지만 우리는 대개 귀족도 아니고 주인도 아니니, 우린 그저 희로애락에 울고 웃는 평범한 인간인 것이다. 우리는 '몰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에' 그렇게 한다. 우리는 우리가 눈물을 흘릴 때 옆의 가족이나 친구가 '너 자신의 주인이 되라!'고 주문하지 않고 그저 손을 잡아주길 바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겨우 그런 것이었다. 아내는 눈물을 닦은 뒤 내가 곁에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아내는 동짓날에도 퇴근이 늦었다. 아내는 밤 10시 반이 돼서야 집에 들어왔고 그래서 난 저녁에 만들고자 했던 팥죽을 만들지 않았다. 동지팥죽은 조선시대에 즐겨 먹던 것으로, 마침 조선시대엔 아침에 밥 대신 죽을 먹는 문화가 있었으므로 동지팥죽을 그날 아침에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난 잠을 늦게 자는 탓에 그만큼 늦게 일어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팥죽을 저녁식사로 준비해야겠다 생각했을 뿐, 아내가 또 야근을 하게 될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지가 하루 지난 그다음날 새벽에야 이렇게 동지팥죽을 끓이게 되었다.

 

 

2.

동지팥죽을 다 만드는 데 약 2시간의 시간이 걸렸다. 음식이 부족하지 않은 시대, 나는 왜 이런 수고를 하고 있는 것일까? 동짓날에 팥죽을 먹거나 뿌려 귀신을 물리친다는 속설은 조선 후기에 영조가 문에 팥죽을 뿌리는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으라고 명한 것[각주: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미 오래전부터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으니 따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동짓날이 되면 난 으레 팥죽을 떠올렸고 그걸 먹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빠지고 말았다.

 

우리는 평생 거주지를 자주 옮기며 살지 않는다. 평생 한 지역에만 머물며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고, 이사를 하더라도 자신이 오랫동안 거주했던 지역에서 멀리 떨어지려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직업 때문에 여기저기 떠돌며 살던 사람들도 은퇴 후 자신이 살 곳으로는 고향이나 자신이 오랫동안 거주하여 잘 알고 있는 곳을 택하곤 한다. 이처럼 고향, 오래 거주하여 잘 알고 있는 지역에 대한 영향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영향력은 우리가 경험했던 민속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지금은 텔레비전과 컴퓨터, 인터넷이 점유한 자유지상의 시대이지만, 어린 시절의 세시풍속에 자주 노출되었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때의 풍속을 잊지 않고 있다. 공동체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그것은 점차 흐렷해지기는 하지만 유행처럼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내가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떠올리는 건 동짓날이면 팥죽을 쑤어주시던 어머니와 그 추억과 전통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싶어하는 내 개인적인 성향 때문일 것이다. 팥죽을 먹기 싫어 끙끙대던 그 시절마저 가족의 유대라는 소속의 감정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동지팥죽이 세시풍속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이제 그것은 민족적 동질감으로 나타났다. 그날이 되면 모두가 하는 어떤 행위, 그리고 그로 인한 유대감. 

 

마이클 샌델이 특히 강조했던 바대로 연대의식은 삶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다.[각주:2] 그렇기에 우리는 단순히 고향이 같다는 것만으로, 같은 운동을 한다는 것만으로, 같은 날 같은 음식을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묘한 동질감에 사로잡힌다. 이런 감정은 외국에 나가면 그 나라의 전통 음식을 맛보려 하는 시도와 닿아 있다. 그 나라의, 그 지역의 전통 음식을 맛보는 것에서 우리는 우리가 바로 그곳에 있다는 현장감을 느낀다. 그리고 몇 백 년 전부터 내려온 그 전통에서 미미하게나마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연대의식을 공유한다.

 

해가 떠오르자 난 아내를 깨운 뒤 그릇에 팥죽을 담았다. 그곳에서, 훗날 우리 가족의 식문화라 부르게 될지도 모를 어떤 의식이 새알심과 함께 떠올랐다.

 

 

3.

우선 팥 300g을 잘 씻은 뒤 한 번 끓였다. 그렇게 한소끔 끓인 물을 전부 버린 뒤[각주:3] 다시 물을 받아 1시간 정도 끓였다. 

 

물이 끓는 동안 찹쌀가루로 새알심을 만들었다. 동짓날 팥죽을 만들려고 미리 사두었던 찹쌀가루였는데, 그간 이리저리 사용한 탓에 전부 합해 180g이 나왔다. 200g이 목표였는데 조금 부족했다. 여기에 물을 부어 반죽을 만든 뒤 동그랗게 말면 새알심이 된다.

 

찹쌀은 밀과는 달리 글루텐이 없어서 차가운 물로는 반죽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뜨거운 물로 반죽의 전분을 호화시켜 점성을 생기도록 해야 하는데, 이렇게 만드는 반죽을 익반죽이라 한다. 익반죽을 하기 위해 물을 끓인 후 찹쌀가루에 물을 조금씩 넣어가며 반죽을 했는데, 아뿔싸, 물 조절에 실패하고 말았다. 물을 너무 많이 넣어서 끈적한 묽은 반죽이 되고 만 것이다. 점성을 낮추려면 가루를 더 넣어야 했는데 찹쌀가루는 이미 다 쓰고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밀가루를 넣어 보충했다. 그나마 글루텐이 가장 적은 박력분을 골라 반죽에 보충했다. 

 

새알심을 만든 뒤 설거지 등의 뒷처리를 하고 나니 1시간 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다음으로 냄비에서 끓이던 팥을 꺼내 으깨었고, 그렇게 해서 나온 팥죽에 찹쌀 100g을 넣어 같이 끓였다. 찹쌀이 냄비 바닥에 늘어붙지 않게 잘 저어주다가 새알심을 넣은 뒤 새알심이 익어 떠오를 때까지 끓였다. 마지막으로 소금을 조금 넣어 마무리했다.

 

팥죽을 만들 때 사용한 팥. 적두라고도 한다. 서울, 2018.12.23.

 

찹쌀가루와 박력분 밀가루를 섞어 만든 새알심. 서울, 2018.12.23.

 

 

  1. 동지팥죽에 관한 영조의 명은 다음과 같다. "동짓날의 팥죽은 비록 양기의 회생을 위하는 뜻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문에다 뿌린다는 공공씨(共工氏)의 설(說)도 너무 정도(正道)에 어긋나기 때문에 역시 그만두라고 명하였는데, 이제 듣자니 내섬시(內贍寺)에서 아직도 진배를 한다고 하니, 이 뒤로는 문에 팥죽 뿌리는 일을 제거하여,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으려는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1770년 청 건륭(乾隆) 35년, 영조실록 115권, 영조 46년 10월 8일 경진 1번째 기사) [본문으로]
  2. 마이클 샌델의 정확한 표현은 다음과 같다. "(...) 가족과 시민들 사이에서 느끼는 각별한 책임감, 동료와의 연대, 내 마을과 공동체와 국가에 대한 충직(...)에서는 연대 의식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도덕과 정치를 경험하며 흔히 마주치는 특징이다. 연대 의식 없이는 삶을 살아가거나 이해하기 어렵다. (...)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이야기하는 존재, 소속된 존재로 파악한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김영사 2011), 334쪽 [본문으로]</정의란>
  3. 전진주 요리연구가에 따르면 팥을 삶은 첫 번째 물에는 독소가 있다고 한다. '이밥차'에 따르면 처음 끓인 물을 버려야 떫은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는 다르지만 처음 끓인 물을 버린다는 것엔 차이가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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