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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과학관의 적요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8. 8. 2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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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물관을 꽤 좋아하여 어디라도 가는 길에 있으면 되도록 들여다보는 편이다. 하지만 제대로 보려면 최소 몇 시간을 투자해야 하기에 마냥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하긴 어렵다. 설명을 읽어 보고 전시된 유물들을 제대로 살피고 영상실의 동영상까지 모두 시청하려면 박물관의 규모에 따라 편차가 있으나 대개 반나절이 걸린다. 그러니 나와 함께 박물관을 구경하는 사람은 대개 고생을 하게 된다. 입구에 들어설 때까진 분명 같이 걷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점점 거리가 멀어지더니 곧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피지 않으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게 다반사다. 걷다 보면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동행을 발견하기 일쑤다. 게다가 아주 예전엔 수첩과 볼펜을 가지고 다니며 설명판의 내용을 옮겨적곤 했으니 그걸 기다리는 동행도 고역이었고 동행을 생각하다 보면 나도 원하는 만큼 제대로 볼 수 없어 나 역시 불만이었다. 지금이야 일반인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카메라가 나온 덕에 수첩에 옮겨 적는 일은 거의 없다. 또 직접 안내판을 읽는 대신 집에서 사진으로 천천히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예전보단 사정이 많이 좋아졌다. 통영 수산과학관에 갈 때도 내 손엔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내가 마치 시간과 공간을, 무엇보다도 기억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마법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책을 빌려 일일이 붓으로 필사를 해야 했던 옛 선비들은 지금의 내가 아주 부러울 수밖에 없다. 


아내와 아이는 따로 볼일이 있어 나홀로 수산과학관으로 향했다. 폭양으로 달아오른 아스팔트 길을 피해 마치 피신이라도 하듯 과학관 안으로 뛰어들었는데 안은 관람객이 한 명도 없어 시원하다 못해 추운 느낌마저 들었다. 시간이 오전 10시쯤으로 아주 이른 시간은 아니었는데도 나 외엔 사람이 없어 내부의 시스템들은 오직 나를 위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방으로 들어가니 나를 인식한 센서들이 여러 장비들을 잠에서 깨워 일으키기 시작했고, 갑작스런 방문에 놀란 이 인공의 일꾼들은 미리 준비해둔 대사의 운을 떼며 고단한 일터의 반복적인 일상을 무미건조하게 진행해 나갔다. 어떤 방에선 여러 일꾼들이 한꺼번에 내게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외쳐대고 있었다. 같은 말을, 혹여 누군가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하지만 이들은 실망하지 않는다. 애초에 기대라는 것 자체를 하지 않기에. 


그러기를 30여분, 저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사진을 찍으며 매우 천천히 걷고 있었기에 적지 않은 수의 관람객들을 지나쳐 보내야 했다. 그들은 보는 둥 마는 둥 움직이며 전시실을,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필시 산책 중이었을 것이다. 고약할 정도로 뜨거운 한여름엔 과학관에서의 산책도 너그러이 용인되는 법이다.


수산과학관의 열대어들. 통영 수산과학관, 2018.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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