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2017 카페쇼, 커피의 미래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7. 11. 16. 17:01

본문

1.

며칠 전 아기띠로 아이를 안은 채 내가 향한 곳은 2017 카페쇼가 열리는 코엑스였다. 아내의 동행 없이 아이와 단 둘이 그렇게 멀리 나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방문 여부를 두고 고심을 했지만 다음 카페쇼는 일 년 뒤라는 생각에 아기띠를 다잡았다. 탄천 주자창에 차를 댄 뒤 영동대로를 따라 올라가는 동안 추운 날씨 때문인지 아이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아 보였다. 영동대로 지하화 결정을 축하하는 현수막과 어느새 철거되어 공터로 남아 있는 옛 한전 부지, 그리고 코엑스 입구에 있는 강남스타일 동상을 지나쳐 코엑스의 문을 열었다. 일찍 온 편이었는데도 내부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평창 동계 올림픽 마스코트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은 뒤 카페쇼 입장권 등록을 마쳤다. 난 안내원이 건내주는 입장권을 아이의 목에 건 뒤 양어깨에 아기띠, 한쪽 어깨에 카메라 가방, 한쪽 손엔 카메라, 다른 손엔 짐가방을 든 채 카페쇼 전시장에 들어섰다.



2.

<늑대와 춤을>은 미국의 19세기 서부 정복을 배경으로 하는 미국 영화다. 이 영화는 다양한 모습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는데 그중 하나로 주인공이 대평원에서 커피를 갈이 마시는 장면을 들 수 있다. 미군 장교인 주인공은 서부 근무지에서 우연히 인디언과 마주치게 되었고, 그들과의 친교를 위해 그들에게 커피를 대접하고자 했다. 그때 주인공이 한 일은 나무와 쇠로 만든 작은 장치를 손으로 빙글빙글 돌리는 일이었다. 영화를 보던 당시에 나는 초등학생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커피라는 음료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지식이란 '커피엔 역시 프리마' 따위의 카피라이팅과 커피를 어른들에게 대접할 때 필요한 커피 배합 방법 정도가 전부였으니, 나로서는 주인공이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주인공인 케빈 코스트너는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한동안 그 장치를 돌려댔고, 그동안 인디언들은 '저 녀석이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당시 주인공의 행위를 바라보는 나의 모습은 인디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기억, 나를 궁금케 했던 그 장면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채 살아남아 있었다. 아마도 그것, 커피가 당시의 내게 엄격하게 금지된 것이었고 어른들은 그게 무엇인지 설명을 잘 해주려 하지 않았기에 내게 더 강한 인상으로 남게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것은 비디오를 켜면 영화 첫 부분에 반드시 등장하였던 다음의 내레이션,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법 비디오들을 시청함에 따라 비행청소년이 되는 (...)"을 내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와도 맥을 같이 하고 있을 것이다. 당시 나는 '호환, 마마'가 무엇인지 몰랐고, '호환, 마마'라는 단어가 나올 때 왜 갑자기 호랑이가 배경으로 등장하여 울부짖는지도 알 수 없었으나 그걸 감히 어른들에게 물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비디오를 시청하다가 잘못하면 '비행청소년'이 될 수도 있다니, 괜한 언급을 했다가 내게 금지된 수많은 것들에 비디오마저 추가될까봐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호환, 마마'란 단어가 나올 때 뒤에서 호랑이가 울부짖던 모습이 여전히 내 머리속에 선하다. '금지된 것의 유혹'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하게 된 것은 어쩌면 그때가 처음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금지된 어떤 것, 그중에서도 특히 커피는 나를 원대한 선망과 관심으로 이끌었다. 난 '커피가 맛있어지기 시작하면 비로소 어른이 된 것'이라는 어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쩌면'이라는 가능성마저 버리지는 않고 있었다.



3.

이런 금지령이 나에게만 특별한 영향을 미친 게 아닌 건 분명하다. 사실 강압적인 금지령의 광고 효과는 이미 널리 증명이 되어서 별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한다. 말해둘 만한 것은 커피에도 그런 금지령에 의한 확산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1525년에 메카에서, 1539년엔 카이로에서 커피 금지령이 내려졌었고, 나아가 1633년엔 이스탄불의 모든 카페가 강제로 폐업을 당했다. 유럽의 첫 커피숍이 어느 도시에서 생겨났는지, 1645년의 베네치아인지 1650년의 옥스퍼드인지는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지만, 아랍의 커피 금지령이 커피가 유럽으로 수출되는 데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커피는 과거의 금지령을 비롯하여 지식인 계층의 신문과 더불어, 더 나아가 문화가 되어 퍼져나갔다. 지금 우리에겐 무엇이 더 있을까? 지난 12일에 방문하였던 2017 카페쇼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행사 마지막 날이라는 게 잘 실감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대규모의 사람이, 그것도 거의 대부분 2,30대 층을 이룬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풍경을 그리 흔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도 기호품 하나로. 카페쇼 마지막 날인 일요일에도 사람들은 극적으로 붐볐고 비싸기로 유명한 코엑스 주차장은 만석으로 입장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뉴스는 거리의 카페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고 보도하지만 사람들의 행보를 보면 꼭 그럴 것 같지는 않다. 18세기 말 베네치아에는 311개의 카페가 들어섰었는데 이는 시민 500명당 하나에 해당하는 숫자였다.[각주:1] 지금도 한 집 건너 한 집이 커피숍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이미 18세기 베네치아의 산 마크로 광장에는 무려 34개의 커피숍이 몰려 있었다.[각주:2] 그때와 지금의 도시 인구 및 유동성을 고려하면 현재 상태를 포화라 말하기엔 아직 이른 듯하다. 게다가 커피의 영역은 그때보다 훨씬 더 넓어졌다.


2017 카페쇼 커피 시음회. 서울시 삼성동, 2017.11.12.



2017 카페쇼에서 역사가 100년이 넘는 업체들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901년에 커피를 빠르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계(오늘날 에스프레소 머신의 전신)를 만들어 특허를 낸 루이지 베제라는 베제라(Bezzera)라는 이름으로, 1902년 9월에 베제라의 특허를 사들였던 파보니는 라파보니(La Pavoni)라는 이름으로, 1912년에 밀라노에서 에스프레소 기계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주세페 심발리는 라심발리(La Cimbali)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카페쇼에 들어서 있었다. 이들에 비하면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1948년에 증기 대신 피스톤이 밀어내는 물을 이용하여 에스프레소 크레마 추출 기계를 합작해낸 아킬레 가찌아와 발렌테 역시 오늘날까지 가찌아(Gaggia)와 훼마(Faema)라는 이름으로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이들은 앞으로도 쉽게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지 않을 것이다.



4.

인스턴트 커피에서 드립 커피로, 드립 커피에서 에스프레소 커피로, 에스프레소 커피에서 라테와 다른 것들과의 퓨전으로, 혹은 그 반대의 방향으로, 한 사람의 관심이 그 자리에 정체되지 않고 있다. 분쇄 커피를 구매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볶은 원두를 구매하여 집에서 직접 갈아마시더니, 이제는 자신이 직접 볶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대개 취미란 어느 순간 금세, 그것도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식어버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커피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영역을 더 넓혀가고 있다. 주 고객이 2,30대의 젊은 층이라는 것도 긍정적이다. 이들은 앞으로도 몇 십 년간 자신의 기호를 쉽게 바꾸지 않을 것이니. 어떤 기호품 산업도 사람들의 관심을 이 정도로 광대하게, 다분야에서 끌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단지 커피라는 이름 하나로 한 자리에 모이고, 그곳에서 또 다른 영역으로 관심을 이동시킨다. 커피에서 커피를 담아 마실 그릇으로, 또는 커피와 함께 곁들일 제과와 제빵으로. 커피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기다란 퍼레이드. 


난 이 행렬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지 못한다. 때로는 이들이 원을 이룬 채 끝없이 돌고 있는 듯한 느낌도 받는다. 행인의 수는 한정적이지만 원을 이룬 이 행렬은 지치기 전까지 돌기를 멈추지 않을 것만 같다. 시작도 끝도 없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오늘날 향신료 전쟁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내가 하는 생각은 왜 당시 사람들이 (대개의 현대인들이 그리 관심을 갖지 않는) 이들 향신료 때문에 전쟁을 벌였을까 하는 의문이다. 네덜란드가 말루쿠 제도의 룬 섬에서 나는 육두구 때문에 영국에게 뉴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을 양보했다는 글을 읽으면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때 사람들이 그걸 대단하게 취급하고 또 좋아했다는 사실에. 하지만 17세기 초 베네치아의 향신료 가게에서 비싼 가격에 거래되던 커피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이들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이 분명하다.


  1.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지음, 윤병언 옮김 <맛의 천재> (책세상 2016), 329쪽 [본문으로]
  2. 같은 책, 같은 쪽 [본문으로]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