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다듬어진 음식 재료가 아니라 가공되지 않은 싱싱한 상태의 야채나 과일을 보면 괜스래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여러 가공 단계를 거친 완성품을 사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 그것이 소비 문화의 중심이자 추구 목적인 사회에 거주하고 있지만 난 여전히 완성 이전의, 태생의 것에 보다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수입이 줄어든 젊은 세대들이 이제 재료를 구해 집에서 직접 요리를 해먹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는 자본주의적 발상의 기사들이 사회면을 채우고, 돈을 주고 사면 될 것을 돈이 부족하니 저 고생을 하며 직접 만든다는 물질주의적 핀잔이 당연시되는 세태에 내가 속해 있긴 하다. 그런 발상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구매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직접 만드는 즐거움이, 더 나아가 무언가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내는 즐거움이 중요시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런 시대가 오리라는 걸 미리 예감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그런 방식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시중에 내 마음에 드는 치킨 스톡을 내놓지 않은 사업자들과 미가공 상태의 허브들이 날 치킨 스톡의 세계로 이끈 셈이다. 정제수가 96%에 달하는 치킨 스톡과 정제염을 50% 가까이 퍼넣은 치킨 브로스를 판매하는 회사들은 날 신선 코너로 밀어 넣었고, 그곳에서 만난 막 뜯은 파슬리와 셀러리는 날 숲속으로 이끌었다. 정말이었다. 셀러리를 코에 대는 순간 난 제주도의 비자림이나 한림공원으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것들을 카트에 넣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난 치킨 스톡 요리에 필요한 재료를 모두 갖추게 되고 말았으니 이제 직접 만드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1
온전히 치킨 스톡을 위해 산 것은 아니었지만 대파가 필요하긴 했으므로 우선 대파를 다듬는 일부터 시작했다. 거의 식탁 길이와 맞먹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파였으므로 화장실 욕조를 이용해야 했다. 대파를 욕조에서 씻기고 개수대에서 다듬은 뒤 여러 비닐팩에 나누어 담았다. 대파 다음엔 셀러리였다. 치킨 스톡을 만들고 남은 셀러리는 다음 요리를 위해 따로 보관 처리를 했다. 파슬리도 씻어서 한쪽에 놔두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건조 바질과 월계수 잎, 통후추는 다시백에 담았다. 다른 향신료로 마늘과 양파도 챙겼다. 향신료는 아니지만 당근을 썰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닭은 뼈만 넣을지 아니면 살도 같이 넣을지 고민을 했다. 치킨 스톡과 치킨 브로스를 구분하는 여러 분류법이 있는데, 살코기의 포함 유무로 스톡과 브로스를 나누기도 하기 때문이다. 난 순수 살코기는 뺀 나머지 부위로 치킨 스톡을 만들기로 했다. 닭다리도 살을 바르지 않고 그대로 넣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내가 만든 걸 치킨 스톡이자 치킨 브로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리가 다 되고 나면 국물 대부분은 스톡 용도로 용기에 담고, 남은 약간의 국물과 고기는 잘 버무려 치킨 브로스, 즉 닭고기 수프로 만들 생각이다.
고운 자태의 파슬리. 내가 즐겨 사용하는 향신료이다. 2017. 5.23.
열심히 자란 대파. 너무 길어서 욕실에서 씻겨 주었다. 치킨 스톡을 만들고 남은 부분은 모두 팩에 담아 냉동실에 넣었다. 2017. 5.23.
치킨 스톡을 만들고 남은 셀러리. 보관을 위해 바닥에 축축한 키친 타월을 깐 용기 안에 꽂아 두었다. 2017. 5.23.
셀러리, 파슬리, 바질, 월계수, 통후추, 대파, 마늘, 양파, 당근, 그리고 닭을 한데 넣어 끓이는 모습. 2017.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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