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에 필요한 최초의 실질적 조건, 그것은 토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토지가 있어야 모든 게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나의 관심이 토지, 이른바 땅에 쏠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너무나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사실마저 왜곡해 놓고 있던 약도들(대개 신문이나 잡지의 광고란에서 볼 수 있는)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나는, 한 손에 도화지를, 다른 한 손에는 펜을 든 채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의 지도를 정확하게 그려내겠다며 집을 나섰다. 물론 그 일은 마을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는 마을을 위에서 바라본 정확한 형태의 평면도를 그려낼 수 없다는 걸 증명하며 끝이 났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의 컴퓨터 모니터만한 크기의 커다란 달력을 수십 장 뜯어내고는 그 뒷면을 모두 연결하여 거대한 직사각 형태의 백지를 만든 뒤, 그곳에 전국의 도시와 길과 특산물을 그려넣으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 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엔 당시 내가 가장 좋아했던 교과서인 <사회과 부도>와 아버지의 차에 놓여 있던 <전국고속도로전도>를 구경하는 것으로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의 실질적 형태를 알아내고자 하는 욕구를 어느 정도 해소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소축척지도였기 때문에 마을과 도시의 세부 형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인공위성과 인터넷의 발달 덕분에 자세한 땅의 형태를 알아보는 일은 참으로 쉬운 것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에게 건축이라는 계획은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위성지도의 도움으로 난 이 건축이라는 세계로, 그에 앞서 땅이라는 세계로 조금 더 걸어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원하는 토지를 소유하기 위한 실제적인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법원경매라는 것이 있었다. 난 법원경매라는 강제 매각 절차를 통해 부동산을 시세보다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경매엔 권리분석과 명도절차라는 어려움이 있었다. 말소기준권리 앞의 선순위로 가처분, 법정지상권이 걸려 있거나 분묘기지권이 걸려 있는 경우가 있었고, 소유자와 연락이 닿지 않거나 소유자가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유찰이 여러번 진행된 물건의 경우 권리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분석이 어려운 경우가 많았고, 낙찰이 되더라도 명도소송이 예견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법원 경매로는 내가 입찰을 원할 정도의 입지를 갖춘 매물을 찾기가 너무도 어렵다는 것이었다. 투자가 목적이라면 모를까, 내게 권리분석은 그 뒤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토지 매매는 경매에 비하면 대중적인 방법이었고 매물도 다양했다. 하지만 이 경우도 좋은 토지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토지가 지적도에 표시가 없는 현황도로를 접한 경우가 많았고, 차량이 해당 건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면도로인 경우가 많았으며(이런 경우 대부분의 주민들에 길가에 차를 대는 탓에 이동과 주차에 상당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사유지의 일부를 관습도로로 쓰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현황도로이고 도로가 다른 소유주의 땅을 지나가지만 소유조의 토지사용허가서까지 받아둬서 문제가 없다고 소개하는 곳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도 토지소유자가 바뀌면 허가서란 한낱 종이에 불과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지는 않았다. 어떤 경우는 땅의 형태가 고르지 못했고 심하게 경사가 져 있었으며, 배수로 연결이 어려웠고, 어떤 토지는 도로와의 저촉 문제가 있기도 했다. 특히 '전'이나 '답'은 기존 건축물을 철거하고 비용을 지불해 전선을 연결하더라도 전봇대의 위치 때문에 미관이 좋지 않을 때가 많았다. 토지 공사를 하는데 들일 비용과 시간, 농지전용비, 각종 인허가 문제도 매수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토지는 주변 숲이나 언덕에 가려 빛이 제대로 들지 않거나 아예 방향이 북향인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 업자는 북향이지만 북향의 경치가 좋기에 좋은 매물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곳의 단독주택지를 제대로된 선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럴 경우 평당 가격이 저렴하면 또 모르겠으나, '좋은' 매물이라고 소개된 이상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상당하다. 부동산중개사무소에서는 지목을 '대'라고 소개했는데 지적도에서 직접 확인해보니 '전'인 경우도 있었으며, 중개소에서는 아무 문제 없이 '대'로 전환 가능한 땅이라고 한 곳을 농업기술센터에 연락하여 물어보니, 그곳은 생산녹지지역이고 구획정리된 곳이기에 농지전용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한 일도 있었다. 눈이 많이 오면 쉽게 땅이 얼거나 제설하기 어려운 환경은 아닌지, 주변에 고압선, 봉분, 산업단지가 있지는 않은지, 또 축사나 광산이 있지는 않은지도 고려의 대상이었다. 이런 문제에 비하면 방풍이나 단열은 부차적인, 차후에 고려해도 되는 사항일 뿐이었다.
단독주택지를 고르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대지평수가 도로지분을 포함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고(지적도에는 없는 현황도로가 나 있는 경우에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남향인지, 북향도로를 접하고 있진 않은지, 상수도는 수돗물인지 지하수인지, 화목 보일러를 문제 없이 사용 가능한지, 인도가 집앞으로 나있는지, 주변 학교 및 시내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한지, 주변 주택이 주변 풍경을 차단하지는 않는지, 주변 주택 때문에 건물 방향에 제한을 받거나 사생활 침해를 받게 되지는 않는지, 주변 택지가 오래도록 나대지로 남게 될 확률은 없는지, 향후 주변에 어떤 시설물이 들어올 예정인지, 그 시설이 주택에 악영향을 미치진 않을지, 큰 도로에 접하고 있다면 그 도로의 차량 때문에 시끄럽지는 않을지, 택지 주차장의 위치 때문에 차량 배기 가스가 실내로 들어올 우려는 없는지, 혹시 모를 건폐율과 용적률 제한까지...... 비단 이것 뿐이겠는가. 1
나무 하나를 고를 때도 사용할 용도에 따라 참 여러 가지가 선택지가 나온다. 울림이 좋은 나무, 부식에 강한 나무, 무늬가 아름다운 나무, 페인트를 잘 받는 나무, 강도가 센 나무 등등. 나무 하나를 고를 때도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니, 주택이라는 종합적 사물은 훨씬 더 많은 것들을 검토 대상으로 요구하는 것이 당연했다. 건축은 음악으로 치자면 하나의 오케스트라 연주와 비슷한 셈이다. 작곡부터 악기의 배치와 음파의 반향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지휘자는 그 하나하나를 모두 이해하고 어느 정도는 직접 다룰 줄도 안다. 훌륭한 방청객은 그 의도를 알고 음악을 즐긴다. 그런 건축가를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런 건축주를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