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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피에트로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 (1)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6. 2. 28.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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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피에트로 대성당(성 베드로 대성당)은 로마 여행 중 가장 크게 기대했던 곳이었다. 그리스도교를 빼놓고 유럽 역사를 이야기할 수는 없는데, 그리스도교의 많은 종파 중에서도 큰 줄기를 차지하고 있는 가톨릭의 총본산바티칸시국의 중심 건물이 바로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기 때문이다.


로마는 가톨릭과 많은 관련이 있는 도시이지만, 현재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사실상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세워진 건물이기에 초기 교회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는 않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는─흔히 '암흑기'라는 평가절하된 표현으로 부르곤 하는 중세 시대와 비교하면 (특히 로마에서는) 그 평가가 과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예술적으로 무척 뛰어났기에, 그 시대의 산물인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마치 그 건물이 모든 가톨릭의 역사를 담고 있는 듯한 놀라운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놀라운 건물과 역사를 직접 체험할 시간을 앞두고 있었다. 먼저 오전에 바티칸 미술관을 구경한 후, 점심을 먹으며 한껏 기운을 끌어올린 뒤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찾아 갔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산 피에트로 광장으로 가야 했다. 광장에 들어서기 위해 북쪽으로 난 길(Via di Porta Angelica)을 따라 걸어 갔는데, 그쪽 경로를 택하면 광장 직전에서 웅장한 성문과 성벽을 마주하게 된다. 이 아치형의 성문(Fornice di Via di Porta Angelica)은 레오 4세(재위 847~855) 시절에 만들었던 것[각주:1]을 교황 비오 4세(1559∼1565)에 이르러 개축한 것이다. 교황 비오 4세의 본명은 지오반니 안젤로 데 메디치(Giovanni Angelo de Medici)로, 이 성벽과 성문은 그의 이름인 'Angelo'에서 따왔다.

 

비오 4세 시절 만들어진 아치형의 성문. 문 안쪽으로 광장의 열주들이 보인다.

 

이 성문을 지나치면 웅장한 열주문에 둘러싸여 있는 산 피에트로 광장에 들어서게 된다. 이 광장 바로 앞쪽에 위치한 건물이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다.

 

생각보다 관광객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기다리는 줄은 그렇게 길지 않았고, 그 대기 시간도 사진을 찍으며 보내느라 길게 느껴질 틈이 없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곧바로 대기줄에 서느라 광장 이곳저곳을 둘러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광장을 둘러싼 원주회랑의 안쪽에 있었는데, 그곳은 광장 중심부와는 거리가 꽤 멀었기에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빨리 대성당에 입장하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예수의 12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후에 초대 교황으로 추존된 성 베드로의 이름을 딴 성당이다. 성경의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기원후 49년에 예루살렘 공의회을 주최한 성 베드로의 행적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성 베드로의 마지막 행적이다.

 

이후 성 베드로가 로마에서 선교하던 도중 사도 바오로와 함께 순교했다는 것이 외경과 그밖의 기록[각주:2]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각주:3] 그리하여 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 베드로가 묻혔다고 전해지던 바티칸 언덕(Mons Vaticanus)의 공동묘지에 산 피에트로 성당을 짓고,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에 임시로 안치했던 그의 유해를 다시 옮겨와 성상을 모신 제단 아래에 묻었다. 이 공동묘지 옆에는 네로 황제 시절에 완공된 바티칸 원형 경기장(전차 경기장)이 있었는데, 성 베드로는 이 경기장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보면 유래가 깊은 대성당이긴 하나 현재의 명성은 16세기에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각주:4]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명령에 의해 이 성당(5랑의 바실리카식 교회당)을 4세기에 완성하였는데(349년), 이후 로마는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410년)을 시작으로 이민족들의 침입과 종파간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지속적으로 입었고, 거기에다 지어진 지 천 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 성당은 원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고 말았다. 1503년이 되어서야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과 브라만테의 설계에 따라 재건축을 시도하게 되었고, 1506년 착공 시작 후 몇 번의 수정 끝에 미켈란젤로에게로 이어져 오늘날의 모습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이루게 되었으니, 현재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르네상스 시대에 탄생한 셈이다. 광장을 포함한 현재의 모습은 베르니니에게로 이어져 1667년이 되서야 마무리되었다. 즉,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그 유래는 오래되었으나 초기 교회와 관련된 모습을 담고 있지는 않은 셈이다. 굳이 찾아보자면 광장 중심에 있는 오벨리스크 정도가 아주 오랜 역사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로마의 3대 황제인 칼리굴라는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이집트에서 약탈해 왔던 오벨리스크 하나를 옮겨와 자신의 원형 경기장(앞서 말한 전차 경기장)에 세웠는데[각주:5], 산 피에트로 성당을 지을 당시 이 원형 경기장을 헐어내면서 이 경기장에서 죽은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오벨리스크만은 남겨 두었다. 현재 산 피에트로 광장의 중심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가 바로 그것이며, 원래 광장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던 것을 1586년에 성당의 정면부로 옮겨 왔다. 산 피에트로 광장은 이 오벨리스크를 감싸는 원형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 회랑에서 바라본 산 피에트르 광장. 중앙에 오벨리스크가 보인다.

 

광장과 대성당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촬영

 

  1. 레오 4세는 남쪽에서 침입해 오는 이슬람 해적들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레오 4세는 재임 시절 이슬람 해적들과 싸워 이겼으며(오스티아 해전), 이날의 승리가 바티칸 미술관에 프레스코화로 남아 있다. 레오 4세는 바티칸 미술관의 <라파엘로의 방>에 그려져 있는 "보르고의 화재"로도 유명하다. [본문으로]</라파엘로의>
  2.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에서는 해당 문서들을 성경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 내용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본문으로]
  3. 대표적으로 '쿼바디스 도미네'와 성 베드로가 거꾸로 매달린 채 순교하게 된 일화가 담긴 <베드로 행전>이 있다 [본문으로]</베드로>
  4.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중세 초기에도 많은 순례자들의 대표적 방문지였으며, 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카롤루스 대제의 황제 대관식(800년)도 열릴 만큼(이후에도 대관식은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16세기 공사 과정에서 거의 완전히 파괴되어 원형을 알 수 없게 되었고 그 와중에 벽화들도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따라서 현재의 명성은 16세기에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본문으로]
  5. 어떤 곳에서는 이 오벨리스크가 로마의 세 번째 황제인 칼리굴라 시절에 이집트에서 약탈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오벨리스크 하단의 라틴어에는 이것이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옮겨지기 시작한 것이라 적혀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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