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피에트로 대성당(성 베드로 대성당)은 로마 여행 중 가장 크게 기대했던 곳이었다. 그리스도교를 빼놓고 유럽 역사를 이야기할 수는 없는데, 그리스도교의 많은 종파 중에서도 큰 줄기를 차지하고 있는 가톨릭의 총본산─바티칸시국의 중심 건물이 바로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기 때문이다.
로마는 가톨릭과 많은 관련이 있는 도시이지만, 현재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사실상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세워진 건물이기에 초기 교회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는 않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는─흔히 '암흑기'라는 평가절하된 표현으로 부르곤 하는 중세 시대와 비교하면 (특히 로마에서는) 그 평가가 과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예술적으로 무척 뛰어났기에, 그 시대의 산물인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마치 그 건물이 모든 가톨릭의 역사를 담고 있는 듯한 놀라운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놀라운 건물과 역사를 직접 체험할 시간을 앞두고 있었다. 먼저 오전에 바티칸 미술관을 구경한 후, 점심을 먹으며 한껏 기운을 끌어올린 뒤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찾아 갔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산 피에트로 광장으로 가야 했다. 광장에 들어서기 위해 북쪽으로 난 길(Via di Porta Angelica)을 따라 걸어 갔는데, 그쪽 경로를 택하면 광장 직전에서 웅장한 성문과 성벽을 마주하게 된다. 이 아치형의 성문(Fornice di Via di Porta Angelica)은 레오 4세(재위 847~855) 시절에 만들었던 것을 교황 비오 4세(1559∼1565)에 이르러 개축한 것이다. 교황 비오 4세의 본명은 지오반니 안젤로 데 메디치(Giovanni Angelo de Medici)로, 이 성벽과 성문은 그의 이름인 'Angelo'에서 따왔다. 1
이 성문을 지나치면 웅장한 열주문에 둘러싸여 있는 산 피에트로 광장에 들어서게 된다. 이 광장 바로 앞쪽에 위치한 건물이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다.
생각보다 관광객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기다리는 줄은 그렇게 길지 않았고, 그 대기 시간도 사진을 찍으며 보내느라 길게 느껴질 틈이 없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곧바로 대기줄에 서느라 광장 이곳저곳을 둘러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광장을 둘러싼 원주회랑의 안쪽에 있었는데, 그곳은 광장 중심부와는 거리가 꽤 멀었기에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빨리 대성당에 입장하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예수의 12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후에 초대 교황으로 추존된 성 베드로의 이름을 딴 성당이다. 성경의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기원후 49년에 예루살렘 공의회을 주최한 성 베드로의 행적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성 베드로의 마지막 행적이다.
이후 성 베드로가 로마에서 선교하던 도중 사도 바오로와 함께 순교했다는 것이 외경과 그밖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2 그리하여 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 베드로가 묻혔다고 전해지던 바티칸 언덕(Mons Vaticanus)의 공동묘지에 산 피에트로 성당을 짓고, 산 세바스티아노 성당에 임시로 안치했던 그의 유해를 다시 옮겨와 성상을 모신 제단 아래에 묻었다. 이 공동묘지 옆에는 네로 황제 시절에 완공된 바티칸 원형 경기장(전차 경기장)이 있었는데, 성 베드로는 이 경기장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3
이렇게 보면 유래가 깊은 대성당이긴 하나 현재의 명성은 16세기에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명령에 의해 이 성당(5랑의 바실리카식 교회당)을 4세기에 완성하였는데(349년), 이후 로마는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410년)을 시작으로 이민족들의 침입과 종파간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지속적으로 입었고, 거기에다 지어진 지 천 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 성당은 원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고 말았다. 1503년이 되어서야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과 브라만테의 설계에 따라 재건축을 시도하게 되었고, 1506년 착공 시작 후 몇 번의 수정 끝에 미켈란젤로에게로 이어져 오늘날의 모습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이루게 되었으니, 현재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르네상스 시대에 탄생한 셈이다. 광장을 포함한 현재의 모습은 베르니니에게로 이어져 1667년이 되서야 마무리되었다. 즉,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그 유래는 오래되었으나 초기 교회와 관련된 모습을 담고 있지는 않은 셈이다. 굳이 찾아보자면 광장 중심에 있는 오벨리스크 정도가 아주 오랜 역사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4
로마의 3대 황제인 칼리굴라는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이집트에서 약탈해 왔던 오벨리스크 하나를 옮겨와 자신의 원형 경기장(앞서 말한 전차 경기장)에 세웠는데, 산 피에트로 성당을 지을 당시 이 원형 경기장을 헐어내면서 이 경기장에서 죽은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해 오벨리스크만은 남겨 두었다. 현재 산 피에트로 광장의 중심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가 바로 그것이며, 원래 광장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던 것을 1586년에 성당의 정면부로 옮겨 왔다. 산 피에트로 광장은 이 오벨리스크를 감싸는 원형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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