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레드 플라나리아가 사라졌다. 샌드는 물론, 락을 점령하는 데 이어 일부는 산호 위쪽으로도 올라갔었던 레드 플라나리아들이 갑작스럽게 종적을 감추었다. 약품을 쓴 적도 없고, 생물 병기도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으므로(식스라인 레스가 한 마리 있긴 하지만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레드 플라나리아의 갑작스러운 실종에는 의아스러운 데가 있다. 산호 관련 동호회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거의 모든 레드 플라나리아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살아남은 일부가 스타폴립에 모여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스타폴립은 크기가 성인 주먹보다 컸는데, 불이 꺼진 상태에서도 항상 팁이 풍성하게 나와 있어서 그 아래쪽에 있던 플라나리아들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스타폴립의 위치를 바꾸려고 건드는 순간 팁이 모두 들어가버렸고, 그제서야 가려져 있던 레드 플라나리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 있던 레드 플라나리아들은 살아남은 것일까. 일단 스타폴립을 민물에 넣어 레드 플라나리아들을 떨궈냈다. 바닥에 가라앉은 20여 마리 정도의 플라나리아들이 보였다. 이제 수조의 (거의) 모든 플라나리아들이 정리된 셈이었다.
그간 수조 내의 변화라고는 콧물이끼가 번창했다는 것이 전부였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콧물이끼가 번창하여 락과 샌드를 점령해 나가는 시점에 레드 플라나리아들이 종적을 감추었다. 스타폴립에 살아남아 있던 플라나리아들은 콧물이끼의 영향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까? 스타폴립은 항상 팁이 나와 있었던 관계로 콧물이끼가 영향을 끼치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 어쩌면 콧물이끼가 번창하면서 레드 플라나리아에게 필요한 필수 영양분을 빼앗아가버린 것은 아닐까? 혹은 콧물 이까와 플라나리아의 창궐에 필요한 어떤 물성치가 상반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레드 플라나리아들이 사라진 건 정말 잘된 일이다. 콧물이끼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레드 플라나리아보다는 콧물이끼가 낫다.
2.
레드 플라나리아가 산호, 특히 연산호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인터넷 동호회에서는 거의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반 년 넘게 레드 플라나리아와 함께 생활해 본 결과, 레드 플라나리아가 연산호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영향을 미친다면 산호 위로 올라가 팁이 나오는 걸 방해하는 정도였다. 스타폴립 안에서도 상당 기간 레드 플라나리아가 살고 있었지만, 그 스타폴립은 항상 만개했을 뿐더러 번식 활동도 왕성했다. 물론 인터넷에는 레드 플라나리아가 죽어버린 LPS를 뒤덮고 있는 사진들이 돌아다닌다. 하지만 레드 플라나리아 때문에 죽은 것인지, 물성치가 좋지 않아 죽어버린 (혹은 죽어가고 있는) LPS를 뒤늦게 레드 플라나리아가 점령해버린 것인지, 이에 대한 인과관계가 확실치 않다.
짠물생활을 지금껏 해오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동호회에서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는 여러 '설'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우연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