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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이라는 공간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5. 10. 1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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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국립공원에서 근무할 때 주전골과 흘림골의 나무 데크에 오일스텐 작업을 했던 적이 있다. 탐방로에 데크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관광객이 적고 날이 좋으며 근무자가 많고 통계적으로 사건사고가 잘 발생하지 않는 날을 고르고 골라 3주 정도에 걸쳐 작업을 했다. 온몸에 우주복처럼 생긴 방수복을 걸친 뒤, 혹시나 있을 탐방객들과의 시비를 예방하기 위해 곳곳에 '페인트 주의'라는 푯말을 세워가며 한 작업이었다. 

 

애써 이런 작업을 한 이유는 나무 테크로 사용한 방부목이 습기에 약해서 잘 뒤틀리고 쉽게 썩기 때문이었다. 방부목 테크가 관리 부실로 썩고 뒤틀리면 결국 모두 새로 설치해야 하는데, 신규 작업도 작업이지만 세금도 공연히 낭비되어 버린다. 이런 일이 없도록 귀찮더라도 오일스텐을 주기적으로 바르는 것이다.

 

최근 주방용 싱크대의 상판, 이른바 조리대를 어떤 걸로 할지 고민하던 중 문득 예전의 그 기억이 떠올랐다. 상판으로 흔히 사용하는 인조 대리석은 집안과 조화가 잘 되지 않지만 유지보수와 사용이 편리하고, 반면 원목 상판은 오일이 발라져 있어 어느 정도 오염에 강하긴 하지만 꾸준히 관리를 해줘야 했다. 마치 국립공원의 나무 데크에 오일스텐 작업을 하는 것처럼, 원목 상판은 일 년에 한두 번 오일을 발라 관리를 해야 했던 것이다.

 

집안과의 조화 그리고 가격면에서 원목 상판이 인조 대리석보다 나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럼 유지관리는? 설악산에서 일할 때를 떠올렸다.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유지관리의 편리함을 위해 상판으로 인조 대리석을 쓴다는 건, 유지보수를 쉽게 하겠다며 국립공원 산책로를 나무 대신 철근으로 만드는 셈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방이 단순히 어떻게든 밥을 만들어 배를 채우는 곳에 머물렀다면 나는 그곳에 그리 애착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 부엌, 주방이라는 구획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곳이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기능과 관리의 편함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 아니라, 다시 말해 전자렌지를 이용해 3분 요리를 만들어 내는 곳이 아니라 몸과 시간을 더 사용하더라도 무언가를 만들고 성취해 내는 공간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여러 가지 재료가 다져지고 섞이고 물이 끓고 그런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그 누군가를 위한 어떤 음식이 만들어 지는 곳, 불편함이 오히려 노동의 의미로 다가 오는 곳. 그런 공간이기에 나는 편리함보다는 그런 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는 도구를 선택하고 싶었다.

 

우리 주방은 대형 음식점의 주방이 아니다. 그것과는 다르다. 우리의 주방은 가정이라는 한 공간 안에 놓여 있는 곳, 함께 해야 하는 곳이다. 가족구성원이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집안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곳. 물론 인조 대리석으로는 그런 조성이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다. 전체 구성에 따라 인조 대리석이 더 어울리는 주방도 있을 것이다. 정도와 기호의 차이일뿐 아무려면 어떠하겠는가. 하지만 만일 우리 주방에 쓸 상판으로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원목 상판쪽으로 생각이 조금 더 기울었다면 그 이유는 바로 위와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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