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대화법 - 예수 그리스도와 소크라테스의 죽음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5. 10. 4. 01:55

본문

과연 세상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느냐는 철학적 질문에 분명히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이 몇 가지 있어 보인다. 물론 철학자들은 소피스트적 방법론을 동원하여 그 모든 것을 반박할 수 있을 테지만 합리적 이해의 선에서 적어도 다음 두 가지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과거는 존재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형태로든 좋고 나쁨의 정도를 비교할 수 있는 현재의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들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유는 바로 저 명백한 두 상태들 때문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그 사건을 과거와 미래의 시공간에서 완벽히 분리해낸 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어떤 상태와 정도를 비교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분명 과거에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약을 밑에서부터 짜는 동일한 습관에 대해 '절약하는 사람'과 '쫀쫀한 사람'이라는 상반된 평이 나오며, '그 습관은 당신의 월급이 적기 때문에 생긴 버릇'이라거나 '치약 짜는 습관 생각할 시간에 당신의 외식 비용이나 줄이라'라는 식의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

 

비슷한 방식으로 끝없이 발생하는 이들 문제에 대한 치료법으로 많은 부부 클리닉 전문가, 심리학자, 심리치료사 등이 '말하는 태도'를 언급한다. '말하는 태도를 바꿈으로써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최소한 내가 지금까지 읽어 본 모든 관계 서적들이 그런 대답을 내놓았다. 여기서 말하는 태도란 상대방과 대화를 할 때 상대의 감정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즉 '상대방에게 무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 무례하지 않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상대방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의 태도 변화를 '우선적으로'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즉 우리는 일단 상대방이 자신이 생각하는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도록 요구하는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 설사 자신의 생각이 객관적으로 맞더라도 말이다. 상대방에게 변화를 바라는 것은 당장의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결국 저자들이 말하는 바는 결과적으로 동일하다. 말하는 태도를 바꾸라는 것이다. 그러면 거의 모든 갈등이 해결될 것이라고 매우 희망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런 주장을 하며 보여주는 예시는 무척 교과서적이다. "나는 당신이 이러이러하게 행동해서 상처를 받았어." "그렇네, 당신이 얘기해 주기 전에는 그런 것 때문에 상처를 받는지 몰랐어. 앞으로 주의할게." 이런 예시가 매우 적절하고 희망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 예시가 그들의 잘못된 태도에서 비롯된 갈등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갈등이 말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당연히 갈등의 원인이었던 태도를 바꿈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 태도 이외의 '다른 원인'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즉 어떤 부부가 과도한 외식 비용을 놓고 다투게 되는 예시를 가정해볼 때, 전문가들은 다투는 와중에 오간 격한 대화 분위기를 지적한 뒤 태도만 올바르게 했다면 서로가 이득을 보는 결과를 낳았을 거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주장은 한 가지 가정에 근거한다. 차분한 마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나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상황도 눈에 잘 들어오고, 따라서 보다 성찰하는 태도로 문제를 인식하여 더 나은 결과를 유도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난 이것이 상당히 낙천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온화한 말투와 태도로---상황을 합리적, 도덕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기반 조건인---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벌써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말하는 태도의 변화만으론 갈등 해결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논해야 할 것이다. 먼저 (전문가들이 쉽게 주장하는 것처럼) 그런 온화한 감정을 유지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 낙천적으로 생각해서, 어떤 지속적인 노력에 의해 그런 항구적인 감정 조절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도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갈등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분위기에서 지속되는 갈등으로 넘어갈 것이다. 아무리 관대한 가톨릭 주교와 성격 좋은 이슬람 이맘이 만나 대화를 한다 할지라도, 그들 사이의 근본적 생각 차이(교리)가 하나로 합쳐지는 타협점을 만들어 내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행복이나 치료를 주제로 하는 많은 책들이 서술 말미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세상에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이 있으므로 양보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들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오직 말하는 태도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아무리 좋게 이야기하더라도 아이돌 가수가 되겠다고 주장하는 중학교 2학년 아이의 마음을 공부쪽으로 되돌리기란 쉽지 않다. 한쪽이 자기 주장을 양보하기 전에는 이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결국 그 갈등은 부드러운 대화로 좋게 풀어나가려던 애초의 그 좋은 감정마저도 '엄마는 결국 날 이해 못해' 혹은 '넌 내가 아무리 애써도 자기 삶만 살려고 해'라는 식의 야유로 변해간다. 이렇게 태도는 다시 악화되고, 종국에는 상대방의 태도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결국 '말하는 태도'가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논리적으로 이 주장의 '대우' 또한 참이여야 하기 때문에---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상대방이 태도를 똑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비난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처음부터 이야기했어도 좋은 말, 즉 해결되지 않는 부분에서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라는 말로 돌아가게 된다. 참 쉽게 이야기하지만 실천하기 너무도 어려운 그 말, 그게 가능했더라면 애초에 감정 다툼으로도 치닫지 않았을 그 이해의 경지 말이다. 좋은 관계에 대해 주장하는 많은 책들이 우리 인생에 도움은 되더라도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적인 수행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 상당한 자기 수양을 쌓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너무나 쉽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런 말을 해준다면 그건 양심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책들은 그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대화 방법(7:3의 대화, '나'의 대화법 등등)만으로 모든 걸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런 방법이 가치없다는 것은 아니다. 말하는 태도는 분명 중요하며, 대부분*의 경우에 대화의 기본으로 전제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전문가들이 전해주는 교훈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기억해야만 하는 사실은, 그 좋은 태도를 지녔던 예수 그리스도도 상대방의 분노를 막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어떠한가. 소피스트들의 끊임없는 궤변에도 대단한 인내심을 보이며 그들의 말을 전부 들어주었던 소크라테스였다. 플라톤이 쓴 <에우튀데모스>에서 그의 관용 정신을 살펴보자.

 

"그들의 욕망에 대해서는 그들을 이해해 주어야 하고 화내서는 안 되네. 그와 같은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인지는 생각해야 하지만 말이지. 왜냐하면 분별에 관련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말하고 용기 있게 나서서 싸우며 공들이는 사람은 그게 누가 되었든 그 모든 사람을 아껴야 하기 때문일세."


하지만 이런 소크라테스조차도 독배를 마시고 죽음으로 그의 삶을 끝내야 했다. 성인들이 이런 결말을 맞이한 건 그들이 성스러운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성인이 아니었다면 결말이 어떤 식으로 펼쳐졌을까. 결국 우리는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혹은 용서하라는 자기 수양의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수양의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자기자신의 죽음(그것이 종교적 의미든 사회적 의미든, 혹은 수사적 기법이든간에)일 가능성이 있다. 행복하기 위해선 어떤 실용적 혹은 과학적 방법론만 따르면 된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언급을 피하려고 하는 그 궁극적인 결과물을 우린 받아들일 준비를 하여야만 한다. 하지만 과연 누가 그런 결과를 원하겠는가? 따라서 무엇이 근본적인 원인인지에 대해 서술하지 않는다면, 말하는 태도가 모든 걸 바꾼다고 하는 이들의 주장은 앞으로도 공허한---적어도 과장된---메아리로 들릴 수밖에 없다.

 

 

 

* "항상'이 아니라 "대부분"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움베르토 에코의 다음 서술로 대신하고자 한다: "어떤 상황은 상처가 될지라도 칼을 빼 들어 논쟁하고 비판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자기 생각을 서슴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 토론은 용어의 어원학적인 의미에서부터 <논쟁적>이며, 흔히 전쟁이나 스포츠에 비유되어 정의된다. 오히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될 것이다." 217쪽. 더 자세한 사항은 그의 책 <가재걸음> 중 "더 나빴을 때가 더 나았을까"를 참조할 것.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