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내용이었다. 그 문자는 삶의 목표는 행복이며, 그 행복을 얻는 방법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지 말고 "그냥" 살아가는 데 있다고 했다.
삶을 살아가며 추구해야 할 정답이 무엇인지를 알기는 어렵지 않다. 주변의 아주 많은 것들이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가요, TV 드라마, 소설, 자기계발서뿐만 아니라 길거리의 대형 간판조차도 우리에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들 조언의 특징은 그들이 이미 정답을 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우리가 그 방법을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삶의 의미란 이러이러한 것이니 그렇게 살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이런 주장은 대중들을 향한 각종 매체들의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떤 "젊은이"가 방황과 어려움을 겪는 것은 결국 제도화된 사회가 원하는 어떤 행복으로 향하기 위한 통과의례였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들 말이다. 그 이야기들은 우리 주인공이 훌륭한 가족 구성원으로, 사회를 지탱하는 건실한 직장인으로, 국가를 보존하는 튼튼한 애국민으로 성장하는 결과를 보여주며 끝이 난다. 따라서 그런 형식의 텍스트들은 그게 어떤 소재를 다루고 있건 그 결말을 예상할 수 있다. 바로 "젊었던" 한 인간의 "정형화된 성숙"이다.
육체적인 젊음은 시간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다. 즉 젊음은 언젠가는 끝이 난다. 따라서 정신적인 젊음 또한 언젠가는 끝이 나야 한다는,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는 관념이 생겨난다. 젊다는 것은 성인이 아니라는 뜻이며 이것은 정신적인 미완성을 뜻한다. 이런 생각은 사람이 육체적으로 성인이 되면 정신적으로도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즉 사춘기에나 겪어야 할 정신적 불안을 성인이 되어 드러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심어준다. 설사 그런 불안을 겪더라도 그것은 완성된 인간이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는 것을 결과적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그 완성이 늦으면 늦을수록 그 혹은 그녀는 행복에 반하는 인물로 남게 된다.
잠깐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는, 우리를 둘러싼 명백한 모순들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의연히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결론이 이미 내려져 있다. 그것은 이미 '이것'이 정답이니 이렇게 살면 된다고 말한다. 젊음은 결코 젊음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이때 우리의 인생은---마치 고전적 교양소설처럼---하나의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그 결말을 성취했을 때에만 주변의 칭찬과 존경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결말을 추구하는 삶에서는 사실 젊음이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불필요하게 겪어야만 하는 불안정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한시 바삐 늙기를 원하고 주변에 안주할 수 있기를 바라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바로 행복의 의미라는 정답이 이미 제시되어 있다. 젊음의 역동성은 겪지 않으면 좋은 것, 겪더라도 빨리 끝내야만 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자신의 인생에 젊음이 가하는 열린 결말을 펼쳐 놓는 것은 성숙에 대한 배신이 된다.
그런 교육과 사회적 현실이 적절히 반영된 결과, 이제 젊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예전에 비해 그다지 많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 그들은 방황과 혼란과 도전보다는 성숙한 어른들이 제시해준 '안정'을 위해 곧장 뛰어 간다. 이렇게 우리 시대의 젊음은 이제 버려져야 하는 무엇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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