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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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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녀의 반향

나의 태도는 다분히 반향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냉정한 상대를 대할 때면 나타나는,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그 무엇이 된다. 그래서 나는 테레사가 토마스에게 한 이 말을 이해한다. "당신이 약하길 바라요. 당신도 나처럼 약하길 바라요." 그렇다. 냉정해지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냉정해지기로 결정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자신과 함께 하지 못하는, 혹은 함께 할 수 없는 누군가를 생각할 때 나타나고, 그 누군가의 냉정함은 서로가 함께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그를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심어버린다.

유일무이한 사랑의 감정이 없어도 될 것 같았던 그 강인함, 그리고 자유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차가움마저 느껴지던 그 냉정함이 사라져 약해질 때, 그제야 우리는 사랑에 좀 더 다가설 수 있게 된다. 몸이 아플 때, 갑자기 번개가 치고 바람이 휘몰아쳐 두려움이 엄습할 때, 미래가 혼돈으로 가득 차오를 때, 그렇게 약해질 때─그제야 비로소 강인했던 그는 그 사랑의 반향을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다는 것과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2. 기다림의 시간

때때로 난 휴대전화가 날 불행하게 하는지 행복하게 하는지 혼돈스럽다. 예전에는 편지를 쓰기 위해 한나절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를 찢지 않은 채 우체통에 넣기에 또 한나절의 결심이 필요했다. 지금의 나는 너무나도 쉽게 연락이 가능하기에 긴 생각도 거치지 않은 채 되돌릴 수도 없는 단상들을 섣불리 전해버린다. 그리고 그 마찬가지의 순간성으로 인해 이제는 그 기다리는 응답의 시간 또한 한나절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상대방을 기다리지 않게 해준다는 인식, 혹은 상대방이 나를 기다리지 않도록 해준다는 인식을 통해 사랑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음을, 아니, 느끼고 싶음을 난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난 문득 한 작가의 글을 떠올린다. "(…) 우리가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몇 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긴 것만 같았던 시간은 순식간에 그렇게 되어버릴 것이다. 난 언제나 그 순간을 인식한다. 그 순간에 대한 인식, 그것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고, 동시에 그로부터 완전히 초연해지도록 만든다.


3. 토성의 영향 아래

자신의 삶에 지명을 붙인다는 것은 자신이 현재 그곳에 없음을 뜻하며 그 장소가 단지 추억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파리 일기'가 그렇고 '하노이 일기'가 그렇다. '하노이 일기'라는 글을 쓰는 것은 과거 하노이에 살았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언젠가는 하노이를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곳은 고향이 아닐 것이다.

고향 없는 아스팔트 킨트. 2년 뒤, 난 이곳에 어떤 지명을 붙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때는 이곳이 다른 것들이 아닌 온전히 사랑하는, 언젠가 나와 사랑하게될 그 누군가에 의해서만 체험될 수 있는 곳이 되어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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