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이 프루스트라는 단어는 매우 감상적인 용어가 된 것 같다. 그리 화려하지 못한 행적, 조용한 분위기, 읽기 어렵다고 소문난 긴 문장들, 글 전체에 흐르는 지나치게 묘사적이고 그래서 몽상적으로 느껴지는 내용들.
난 프루스트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프루스트라는 단어를 보면 특정한 분위기를 느낀다. 그것은 어쩌면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들이 설명한 프루스트의 글을 보면서 그의 이름에 사람들이 묘사한 분위기를 이입한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막연히 상상만했던 그의 이미지는 이 책을 통해 다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신문에 항상 등장하는 여러 사건 사고들의 아주 짧은 기고문을 읽으며 삶의 통찰을 발휘했던 프루스트를 보여주며 그가 평소 어떤 상상력을 펼쳤는지를 알 수 있게끔 해준다. 예를 들어 한 청년이 자신의 어머니를 칼로 찔러죽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짤막한 기사를 읽고 프루스트는 이렇게 쓴다.
" (...) 진실은, 우리는 나이가 듦에 따라 우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근심하게 하고 항상 불안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죽인다는 것이다."(55쪽)
또한 그는 비누와는 전혀 상관없는 비누광고용 그림에서도 심오한 사상을 표현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그였기에 불면증에 걸린 한 남자가 공상하는 장면을 17쪽에 걸쳐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프루스트가 남긴 여러 글들을 통해 그의 성격, 생각을 유추하고 그런 유추에서 나온 주장을 옹호하는 방식으로 프루스트에 대한 이미지를 남긴다.
알랭 드 보통이 프루스트에 대해 쓴 책이므로 난 이 책을 읽으며 어쩌면 알랭 드 보통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책을 읽을 땐 대개 화자가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을 땐 알랭 드 보통은 사라져있고 프루스트만이 떠올랐다. 마치 수학 공식에 대해 설명하는 교과서처럼, 그것을 설명하는 화자는 없고 수학 공식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프루스트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난 어쩌면 알랭 드 보통이었기에 가능했던 프루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다. 난 분명히 프루스트를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때로 글의 목소리가 프루스트의 목소리인지 알랭 드 보통의 목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자가 악의적인 목적이 있지 않은 한 그것은 분명 알랭 드 보통 자신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프루스트라는 어렵고 복잡한 인물, 그리고 그만큼 또 어려운 그의 글을 이해하는데 몇 발짝 다가서게 해 준 것은 분명하다. 프루스트는 어떤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천재의 새로운 걸작을 읽게 된다면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경멸했던 우리 자신의 성찰들, 우리가 억압했던 기쁨과 슬픔, 우리가 깔보았지만 그 책이 문득 우리에게 그 가치를 가르쳐 주는 감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프루스트의 그 글을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생각한다. "소설의 가치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것들과 비슷한 정서와 사람들을 표현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의 가치는 그것들을 우리가 묘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빼어나게 묘사할 수 있는 능력, 즉 우리가 명확히 서술할 수는 없었으나 우리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느낌들을 지적해 주는 능력에도 있다. (...) 이렇게 미세하지만 중요한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는 책을 읽으면 이런 효과가 있다. 우리는 그 책을 내려놓고 자신의 삶을 계속하면서, 작가가 우리가 다니는 회사에 있었다면 정확히 반응했을 바로 그것들에 주목할 수 있게 된다. (...) 우리는 하늘의 음영, 표정의 변화무쌍함, 친구의 위선, 또는 이전에는 슬퍼할 줄도 몰랐던 어느 상황 속에 숨겨진 슬픔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 책은 그 자신만의 발달된 감수성으로 우리를 예민하게 하고 우리의 숨겨진 촉각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 (40~42쪽)
프루스트가 그림 한 장을 보고 끝없이 상상하듯 알랭 드 보통도 그의 글을 읽으며 새로운 면을 상상한다. 나는 소설의 가치에 대해 그렇게 멋들어지게 표현한 것을 본 적이 없다. 프루스트의 비범함과 통찰력, 세속적 시각을 탈피한 그의 현인적 측면을 그리 잘 서술한 글을 본 적이 없다. 알랭 드 보통의 글을 읽으며, 프루스트가 왜 그렇게 단순한 사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또 길게 서술했는지, 왜 또 그래야만 하는지 설득당하고 만다. "우리는 보통 10시에 모입니다"라는 단순한 서술에서 "대표단의 차를 타고 오르세이 선착장에 내린 뒤 계단을 올라 방에 들어갑니다. 악수를 하고 마카롱 쿠기를 먹었지요"라는 상세한 서술을 이끌어내는 그에게서, 나는 내가 평소에는 놓치던 삶의 어떤 상징(마카롱 쿠키)을 얻어낼 수 있는지 보게 된다.
또 프루스트는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은 우리의 불만이 삶의 근본적인 결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제대로 (천천히)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문제는 사건들을 축약해버리는 우리에게 있다. 짧은 한 문장으로 끝내버릴 수 있는 문장을 수십 쪽에 걸쳐 묘사하면서, 우리는 평소 놓치고 살았던 사물들을 보게 된다. 만일 그것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어쩌면 매일매일 색다를 수 있는 우리의 삶을 '태어나서 먹고 자다가 죽었다'라는 한 문장을 끝내버리길 기다리는 존재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버리는 셈이다.
그는 프루스트에 대해 썼다. 그리고 그의 글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덧붙였다. 프루스트는 "행복은 몸에 좋다. 그러나 정신의 힘을 길러주는 것은 고뇌다"(94쪽)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 알랭 드 보통은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깊이 있는 증언을 많이 남긴 사람들은 만족하거나 열정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한 지식은 대체로 지독히도 비참한 사람들만의 특권적 영역이자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축복이었던 것 같다"며 긍정한다. 하지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에 대한 낭만주의적 숭배에 무비판적으로 동의하기 전에 고통 그 자체만으로 충분했던 적은 결코 없었다는 것을 덧붙여야 한다. (...) 수많은 불행한 매독환자가 '악의 꽃'을 쓰는 대신에 자살하였다. 그러므로 고통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이득이란 그것이 지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탐구의 가능성---아주 쉽게, 그리고 가장 자주 간과되고 거부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는 것일 뿐이다."(98~99쪽)
사실 고통이란 우리에게 삶의 기술을 가르치기보단 원한과 분노를 쌓게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것이 그만의 독특한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는 프루스트의 말들을 다른 쪽에서 살펴보면서 그의 주장을 옹호하는 동시에 환기시킨다.
이처럼 알랭 드 보통은 이 책 전반에 걸쳐 '프루스트적'으로 생각하기를 설명한다. 여기서 '프루스트'라는 용어는 그의 책을 읽을 때 느껴지는 그의 이미지를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실제모습---작가적 모습과는 상관없는---을 가리키며, 그가 태어난 고장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주유를 하기 위해 방문했던 주유소 앞의 수선화를 가리킨다. 즉 정해진 코스를 관광하는 듯한 상투적인 생각의 방식을 버려야한다는 것, 다시 말해 내가 가지고 있던 프루스트에 대한 감상적인 느낌을 버려야한다는 것,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태도야 말로 기존의 삶과 글쓰기 방식을 탈피했던 프루스트를 보다 더 가깝게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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