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패러다임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쓰이던 때가 있었다. 아마 지금의 '혁신'이나 '스마트' 같은 단어처럼 자주 쓰였을 것이다. 난 그때 그 단어를 쉽게 '틀'이나 '구조' 정도의 의미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궁금해서 알아보니 그 단어는 과학철학사의 한 부분에서 태어난 복잡한 의미를 가진 용어였다.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 그 궁금증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란 책으로 유명한 포퍼와 '패러다임'이라는 용어와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으로 유명한 쿤, 이 두 명의 학자를 가지고 이 책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이 물음에 대한 해소는 이 책의 끝부분에 가서야 이루어졌는데, 결론을 읽고 나니 이 책이 부제를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과학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책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소 이상한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과학을 '당연히'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당연한 것, 즉 과학은 객관적이며 보편적이고 따라서 진리라는 그 특별함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아왔고, 따라서 그 특별함은 따로 주장할 필요가 없어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동안 있었던 과학철학사 내의 논쟁들을 알려주며 과학이 가진 그 특별함이 사실은 허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래서 과학의 특별함에 대해서 왜 이야기해야하는지를 설명한다.
과학은 비판적인 학문으로 언제나 많은 실험과 검증을 통해 진실을 연구해왔고, 그 과학의 위대성에 취해 빈 학파라 불리는 일군의 학자들은 과학의 논리적 완벽함을 보여주는 이론을 정립하려고까지 하였었다. 하지만 그런 시도에서 오히려 과학적 증명방법의 완벽성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는데 그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새로운 이론, 즉 반증주의를 들고 나온 것이 카를 포퍼였다. 이로써 과학은 다시 한번 특별한 지식체계로의 영광을 누리는 듯 싶었으나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과---물론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패러다임론은 상대주의적 과학에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그 이론을 다소 확대 해석한 상대주의적 과학의 등장으로 '과학은 사회적 협상에 불과하다'라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학은 그 위상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고 과학과 다른 지식과의 차이가 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에 도전받아야만 했다. 과학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창조론과 정신분석은 왜 과학이 아닌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언젠가는 다른 이론에 의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면 과학적 증명이라는 것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책의 지은이는 상대주의적 과학과 사회구성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이 책의 마지막 챕터에 집어넣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알린다. 즉, 과학적 증명 방법에는 여전히 단점이 있고 또 해결해야할 숙제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그 특별함에 대한 자기 나름의 짧은 단상으로 챕터를 마친다.
나 역시 과학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은 비판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 바로 그 점이다. 그곳에 단순한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때론 삭막해보이기도 하고 또 비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유전자 결정론이나 사랑마저도 전기적 신호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과학이 증명하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극단적 주장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과학은 단순한 믿음이 줄 수 없는 것을 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그것이 과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이 지닌 특별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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