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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08)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2. 8. 26.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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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의 제목이 선사해주던 그 강렬함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책을 본 순간 그 책은 이미 나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바로 이 책이라는 것을. 천천히, 두고두고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것을, 이 책을 사지 않으면 다른 책을 살 명분이라는 것은 애초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서랍에 꽂아둔 채 가끔씩 이 책의 표지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내 이름은 빨강---이 제목과 표지의 세밀화는 이미 이 책이 가진 깊이를 나에게 던져주고 있었다. 난 책을 읽지는 않은 채 그저 책 겉모습을 바라보며, 아직 탐사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바라보는 듯한 기분으로, 언젠가는 저 곳을 탐험하여 그곳에 숨어있는 보물을 캐내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그 주변을 서성였다. 나중에 알게 된 오르한 파묵의 다른 책들을 먼저 읽어보면서, 끝끝내 이 책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보지도 않을 책을 왜 사서 진열해두냐는, 성질 급한 이들의 질책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천성이 그래서 그런 말을 했다고는 믿지는 않는다. 맛있는 음식을 모조리 해치우기보다는 땅을 파 숨겨둔 채 아껴먹는 습성은 들짐승들에게도 있는 것이다. 단지 그들은 그런 황홀한 음식을, 숨겨두고, 보관하고, 아껴 읽고 싶은 책을 아직 못 만나본 것 뿐이다. 물론 그들은 평생 그런 책을 만나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난 나의 맛에 취하고 싶었다. 그들의 미각이 아닌 나의 미각에. 그렇게 나는 이 책을 읽는 걸 서두르지 않았다. 물론 난 언제나 이 책을, 그러니까 이사 다닐 때마다, 심지어 해외에 나갈 때도 가지고 나갔지만 이 책을 읽는 걸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음식이 부패하듯 그런 감흥이나 유혹도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사라질 수 있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다시 만났을 때 난 이 책을 읽기로 결심하였다. 지금이 바로 이 책을 읽을 시기였다. 마치 격렬한 운동 중간에 호흡이 막혀 바닥에 주저앉는 것처럼 난 이 책을 읽다가 수시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켜야할 테지만 그것은 나의 정해진 길이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 어느 곳이 되었든, 심지어 손발톱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단순이 자라는 것이 아닌 성장하는 과정에 놓이게 될 것이다. - 내 이름은 빨강을 읽기에 앞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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