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를 읽으며 나는 그를 지웠다." 최영미 시인의 '대화상대'에 나오는 구절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은 그러니까 그 시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들을 떠올려도 좋다. 지우고, 잊으며, 서로를 부정한다. 그래서 쓸쓸하다. 아직 다가오지도 않았지만 이미 예정된 삶을 살고, 증거는 나오지도 않았지만 배신감으로 이미 몸을 떨고 있으며, 떠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탈출구가 없는 것만 같은 조용하고 반복적인 권태로운 일상에서, 그나마 서로에게 기댈 어깨라도 있다면 희망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어깨마자도 살짝 쥐면 부스러질 것 같고, 기대면 무너질 것만 같다. 단편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되는 망각, 동면, 술은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주변 상황들을 둘러보게 만든다. 구조적 문제인가? 아니면 그들의 게으르거나 부정적이거나 또는 호색한 성향 때문인가? 몇몇은 절망적인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을 덮치려고 하는 기이한 변화에, 저항하지 않은 채 그저 떠내려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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