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 사용된 기법이 전반적인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피해자인 것으로 보였던 작중 화자가 가해자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발생하는 긴장감이 소설을 이끌고 간다.
소설 중반부를 지날 때면 우리 소설 속 화자를 가해자로 간주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자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자신을 가해자로 여기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타인에게 불행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행동듣도 거리껴하지 않는데, 화자 스스로 그런 행동들을 어쩔 수 없는 일로 간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깊게 볼 점은 가해자인 화자가 취하는 독백체가 우리에게 반성적으로 들려 위화감을 형성하는 동시에 그 가해자에게 연민의 감정을 심어준다는 점이다. 이 점이야말로 작가가 공을 들여 설정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의 코드는 용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수많은 잘못을 하고 산다. 그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데, 대개 우리는 자신이 잘못한 것에 용서를 구하거나 또는 잘못한 상대방을 용서하는 데 인색하다. 자신이 저지른 큰 잘못은 쉽게 잊어버린 뒤 떵떵거리며 살고, 누가 자신에게 저지른 잘못에는 용서가 없는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서로에게 잘못을 했던 두 사람을 등장시킨 뒤 그런 그들의 결말을 비극적으로 그린다.
그런데 난 이 소설을 화자를 가해자로, 또 다른 등장인물을 피해자로 보는 단순 구도로 그리고 싶진 않다. 피해자처럼 보이는 등장인물 '클라임' 역시 소설 속 화자를 용서하지 못했고, 그럼으로써 화를 자초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 말미 부분에 나오는 클라임의 다음 대사를 보자.
"이제 소용없는 것 같네요. 당신이 용서를 빌면 금세 용서해버릴까봐 절대 그러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곤 했는데 그런 걱정을 왜 했을까요? 진심으로 용서를 빌 사람도 아닌데...... 난 새로운 것을 갈구하고 배우려는 당신이 젊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앞으로도 절대 철들지 않을 거라고 말했죠? 내가 그때의 당신보다 나이를 더 먹고 보니 명확하게 말할 수 있어요. 철드는 게 나쁘거나 대단한 게 아니에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무게를 온전히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에요. 당신은 그냥 자기 연민에 빠진 철부지였고, 당신 뜻대로 쉰이 넘은 지금까지 여전히 철이 안 든 것 같네요. 나는 당신을 경멸합니다."
클라임은 다른 여자에게 추파나 던지는 남자를, 게다가 결혼 며칠 전에 자신을 버려버릴 남자를 사랑했다는 문제를 떠안고 등장한다. 마지막엔 아주 오래 전에 벌어졌던 그 일을 끝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쉽사리 용서하지 못한 채 복수까지 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장치를 통해 작가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가 아니라 사실은 서로가 가해자라는, 서로를 용서하지 못한 비극이 일으키는 파국을, 우리가 항상 젖어사는 피해자 의식을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우리가 화자에게서 가해자가 지닌 뻔뻔함에만 주목한다면 소설 밖 우리 역시 잠재적인 또 다른 가해자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실수를 하고 산다. 그렇기에 그것을 어떻게 용인하며 살 것인지를 숙고해보아야 한다. 2000여년 전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졌던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많은 순간을 가해자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이 알지 못합니다."를 우리는 언제쯤 다시 기억할 수 있을까. 여전히 이 세상은 분노로 들끓는다. 자신은 피해자이며 너는 가해자라는 분노가, 그러므로 너 역시 당해야한다는 폭력이. 이 이 소설은 그것을 드러내는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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