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의 '길'이란 수필을 우연히 만났다. 김기림하면 흔히 시만을 떠올리기에 그의 수필은 다소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가만히 읽어보았는데---참으로 정갈한 글이었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짤막한 글이기에 아래에 전문을 실어본다.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악돌처럼 집었다가 조악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 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 김기림, 길. 유종호, '문학이란 무엇인가', 78~79쪽에서 재인용
낭독을 해봐도 좋을 문장이다.
* 이 글은 수필집인 '바다와 육체'에 실려있고 내가 이미 위에서 수필이라 적은 바 있으나 실은 대개 산문시로 평가된다. 시의 세계가 가지는 정취, 즉 '포에지'가 들어있기 때문 아닐까,라고 유종호는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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