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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게임과 놀이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3. 12. 26.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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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컴퓨터 게임은 일반적인 컴퓨터, 스마트폰, 닌텐도나 XBOX와 같은 게임기, 오락실의 게임기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게임들의 특징은 육체의 활발한 움직임이 필요하지 않고 특정한 내부 공간에 할당되어 있으며 주로 두뇌활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큰, 그리고 널리 알려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 반복적이고 소모적이며 폭력적이고 비창조적이며 중독성이 강하고 무엇보다도 저급놀이라는 것이다.

그런 특징은 게임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우려의 눈길로 보게 만들었다. 10분을 하건 한 시간을 하건 게임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형편없이 느껴진다.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 우리의 시선은, 그가 하루의 피로나 스트레스를 푼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게임 중독자 또는 할일 없는 놈팽이를 보는 그것이다. 이런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사람들이란 말기 암환자나, 노동 생산능력이 없는 65세 이상의 인구 가운데서도 별다른 소일거리도 없이 하루 종일 죽음만을 기다리는 노인층뿐이다. 즉, 무언가 육체적, 정신적, 시간적 여유와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게임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불순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비슷한 취급을 받는 놀이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만화책 보기, 판타지 소설책 보기, 의미 없는―의미 없음을 규정하기는 어렵지만―웹서핑하기(퇴폐적인 성향의 놀이는 제외했다). 이런 류의 행동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게임을 하는 행위와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성별이나 나이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놀이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전화로 또는 카페에서 수다 떨기, 채팅, 낚시, 당구, 카드게임, 코스프레, 연예인 따라다니기, TV 또는 B급 영화 시청, 시집/수필/연애/판타지/무협 소설책 읽기, 술마시기, 낮잠/늦잠자기 등.

비슷한 취급을 받는 저런 저급 놀이와 게임 사이에는 특별한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게임이 다른 저급 문화보다도 더 경멸적인 시선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엔 불량한 건달들이 담배를 피며 인생을 낭비하는 장소로 만화방이나 당구장을 상상했는데 지금은 PC방이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 집에서 만화를 보는 아이와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는 아이를 상상해보라.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는 아이를 혼내주고 싶은 생각이 더 강하게 들 것이다. PC의 등장은 오래되지 않았으나 그 파급력은 막강하였는데 그것은 게임에도 마찬가지였다.

게임이 이런 위상을 차지하게 된 원인에는 그것이 굉장히 비생산적인 일처럼 보인다는 것에 있다. 차리리 만화책을 보거나 늦잠을 자는 것이 생산적으로 보일 정도다. 물론 그것은 가정이다. 게임을 할 시간에 TV로 드라마나 연예 프로그램을 보는 게 낫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따라서 향락의 제한을 주장하며 모든 놀이를 금하는 청교도적 집안이 아니라면, 게임을 금하는 동시에 TV 드라마를 시청하는 행위를 허락하는 것은 모순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이 아주 자주 벌어진다.

나는 그 이유 중 하나를 게임이 세대를 아우르지 못하며(나이 드신 분들은 즐겨본 적이 없다), 게임을 하면 게임 그 자체가 주가 되어버린다는 약점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쨌든 놀이는 필요한 것이다. 한 가족이 오랜만에 모였는데 TV도 켜지 않은 채 거실에 나란히 앉아있으면 어색하기 짝이 없다. TV라도 켜고, 거기서 즐기는 드라마 또는 반복적이고 자극적인 뉴스의 가십거리 얘기라도 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게임은 그럴 수가 없다. 어쨌든 놀이를 통해 관계를 맺고 싶은 건데, 관계는 사라지고 놀이만 남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신통치 못한 답변이다. 그런 문제는 같은 게임 문화를 즐기는 연인이나 젊은 부모와 자식 간에도 나타나기 때문이며, 게임을 통해서도 관계라는 건 얼마든지 만들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게임이 사람을 폐쇄적으로 만든다는 보도가 많은데, 그것은 부정적이고 불안하며 자극적인 기사를 좋아하는 언론의 특성일 뿐 게임이 사람들의 관계 형성에도 많은 기여를 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는―전 단락에서 얘기했던 것처럼―게임이 비산생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엔 생산적인 놀이엔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임이 비생산적이라서 거부된다면, 생산적일 수 있는 놀이만을 허용해야 할 것이다. 생산적인 놀이의 대표적인 것에는 운동이 있다. 이것의 생산성은 대개 육체를 건강하게 해준다는 데 있다. 그런 운동으로는 조기축구, 등산, 테니스, 마라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놀이 또한 과도한 육체적 사용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 육체적 건강함을 생산하는 것(예를 들어 헬스)이 놀이라고 인정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승마나 요트, 골프, 행글라이더 같은 상대적으로 운동량이 적은 운동이 고급 취미로 인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육체적 건강함을 주지 못하는 다른 놀이가 인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게임을  적합한 놀이에서 배제할 수 있는 타당한 요소는 되지 못한다. 가령 영화/연극 관람, 미술품/음악 감상들이 그와 같다. 그렇다면 이들 놀이가 주는 생산성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아마도 교양의 증가로 볼 수 있을 듯한데, 아쉽게도 위 놀이를 하는 사람 중에 예술적으로나 감성적으로 교양을 쌓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공부를 하러 간 게 아니라 단순히 즐기러 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양을 쌓는 생산성보다는 다른 것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가시간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는 데  있다(이런 취미들은 위에서 말한 요트, 승마 등과 공통된 점이 있는데, 땀을 많이 흘리지 않고, 상대적으로 비용이 많이 들며, 상류층이 많이 찾고, 여유롭게 즐기는 게 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놀이를 선택하는 데 있어 세대적 공감대 형성, 관계 형성의 가능성, 육체 또는 정신적인 생산성 유무, 교양지식의 습득 가능성을 따지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결국 우리는 그런 걸 가지고 게임을 우리가 즐길 수 있는 놀이의 하나에서 추방시킬 수는 없게 된다. 그럼 어쩌면 게임의 중독성과 폭력성 때문일까? 그러나 많은 놀이가 상호간에 무언가를 겨루는 데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또 그 자체로 중독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게임만을 차별시키는 요소로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컴퓨터 게임은 모두가 같이 즐길 수도 없기(대개 한 가정에 PC는 1대뿐이며 혼자만 쓸 수 있다) 때문이라는 설명은 어떨까? 그것은 10년 전의 얘기다. 지금은 네트워크를 통해 함께 즐길 수 있는 시대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런 설명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컴퓨터 게임이 늦게 태동된 놀이라는 점이다. 즉, 게임을 즐기는 사람은―예전에 컴퓨터가 나타나기 전, TRPG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그러했듯이―제한적인 부류라는 것이다. 실로 놀이라는 걸 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다. 드라마를 보고, 오락 영화를 보고(예술 영화를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코미디언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본다. 이것들은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크게 침투해 있는 상태이며 성별이나 연령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컴퓨터라는 것은 그 자체가 주로 어린 남자애들과 젊은 남성들의 소유물이었던 데다가, 게임이라는 게 초기에는 컴퓨터나 게임기만을 통해 가능했으니 더 상대적으로 소수의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즉 익숙해질 수 있는 놀이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러나 이 역시도 뭔가 만족스럽지 못하다. 컴퓨터는 이제 많이 보급이 되었고, 남성들만의 전유물도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를 통한 놀이로 웹툰을 보거나 웹서핑을 하거나 싸이월드, 블로그, 페이스북 등을 하며 지내지, 게임을 하지는 않는다. 컴퓨터를 통한 많은 놀이 중에서 여전히 게임은 가장 최악의 놀이라는 불명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은 그렇다. 게임을 놀이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논리적 근거를 만들기는 어렵다. 모든 놀이가 지닌 나쁜 점들의 합집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도 해보았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여유있는 자들의 놀이도 아니고 생산적이지도 못하며 음습하고 중독성이 있는 데다가 모두가 싫어하는 놀이.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저런 전제는 모두 획일적인 문제점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하철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를 보는 사람보다는 그 옆에서 게임을 하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더 큰 딱한 감정을 느끼곤 한다.

내가 여기서 확인한 것은 사람들이 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즉,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무언가 의미 있는 삶을,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도대체 게임에서는 그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을, 삶을 허비한다. 그래서 게임을 싫어하게 되고, 심지어 게임을 하는 사람들마저 스스로를 혐오하게 된다. 만일 그들이 삶을 하나의 놀이나 소풍쯤으로 여겼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들은 그들이 의미있는 존재라고 믿고 싶어하며 따라서 내가 아니라 내 자식이나 내 친구나 내 남편이나 내 아내가 그런 의미있는 일을 하길 바란다. 어쩌면 놀이가 더 멀리 뛰기 위한 준비동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강한 의미 지향은 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그 놀이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놀면서도 사람들은 불안해진다. 너무 많이 놀고 있는 건 아닌지, 이제 일을 해야하는 건 아닌지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결국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제대로 일이나 공부를 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이어진다. 노는 대신 뭔가 더 이롭고 유용하고 의미있는 일에 시간을 써야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불안을 가장 크게 자극하는 것이 바로 게임인 것이다. 자신은 잘 모르는 것, 해보지 않은 것, 그걸 통해 돈을 벌 수 없는 것, 잘한다고 해서 명예롭지도 않은 것, 권력이 주어지지도 않고, 누굴 이롭게 할 수도 없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어려운 것, 게다가 주변 사람들이 칭찬하지도 않는 것. 사실 중산층 이하 서민들이 즐기는 놀이라는 것 역시 본디 그런 성향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마치 어떤 직업을 천대하는 것처럼―사람들은 그 놀이를 천대하고자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이를 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살만한, 아니, 적어도 손가락질은 받지 않을 바로 그런 놀이를 하고 싶어하며, 그런 방식을 통해 보다 고상한 다른 놀이를 즐기고자 하는 자신을 정당화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런 정당화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강하게 추구하는 삶의 의미가 그렇듯, 그들의 놀이도 그들이 원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놀이는 합당한 방식이 아니라 대중들의 세속적인 기호에 따라 선택되며, 따라서 우리는 컴퓨터 게임은 경멸의 눈으로, 자신들의 하인은 기차에 태워보낸 뒤 우편마차에서 여유를 즐기는 영국 귀족들의 놀이는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런 식으로 선망의 대상이 된 놀이는 그들이 본능적으로 원하는, 삶의 경건한 목적의식과 근본적인 충돌을 일으킨다. 그래서 그들은―그리고 나 또한―삶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알 수 없는 어떤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왜 살아가는지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놀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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