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제목이 그냥 "알렉산드리아"가 아니고 "소설 알렉산드리아"이다. 소설 중에서 책 제목에 '소설'이라고 명기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알린 책이 얼마나 될까. 이 책을 읽기 전, 소설이라는 단어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라는 이국의 지명이 묘하게 마음을 끌었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난 후의 전반적인 느낌은 애초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작가가 이 글을 쓴 시기적 차이 때문인지 지금은 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비표준어, 자주 쓰이지 않는 한자어가 종종 나왔다. 허탈해버리다, 에트랑제, 빙화, 운필, 광말, 어색스럽다, 비로드, 카바레, 시심, 신기로운 꿈, 망막감, 전율감, 화란, 룸펜 등. 그런 표현들은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했지만, 오히려 예스럽게 만들기도 했다(문득 김연수 씨의 초기 작품들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의 눈으로 보면, 온갖 형용사와 한자어를 한껏 사용한 묘사법들이 굳이 필요한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화자와 화자의 주인공인 형과의 성격상의 대치는 작위적인 데가 있고, 알렉산드리아 최고의 절세 미녀가 화자에게 끌려 마음을 열 뿐만 아니라 그녀의 고향은 스페인 내란으로 파괴당한 게르니카. 게다가 그녀가 당시 폭격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부자연스럽다. 잘 알지도 모르는 주인공에게 그녀가 자신의 복수 넘치는 계획을 말하는 장면도 그렇다. 말 그대로 '소설 같은' 설정. 그 설정은 점점 심해져서, 그녀는 주인공의 형이 쓴 편지를 자신에게 읽어달라는 요청까지 한다. 평범하게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상황 전개가 거북스러웠다. 현대 소설이라면 한국인인 주인공과 스페인이 고향인 여자와의 대화조차 언어 소통의 문제를 고민하며 썼을 것인데, 주인공과 이 이국 여성의 대화는 자연스럽기 그지 없다. 그녀에게 골라서 읽어주는 편지마저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읽어주기에 부적합한 내용들(자유, 권력의 문제)이었고, 나중에 만난 한스라는 사람은 십오 년째 가슴속에만 간직해뒀던 비밀을 만난 지 그리 오래 되지도 않은 주인공에게 털어 놓는다.
구성만으로 보자면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볼 수 있으나 이 소설이 쓰여진 시기(1960년대)를 고려하면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고 또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6.25 이후 독재, 4.19 혁명, 5.16 군사정변, 계엄령과, 6.3 사태.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과 희생, 한편에서 그런 혼란을 나몰라라 했던 수많은 사람들과의 분열. 그 때의 혼란한 시대상을 본다면, 게다가 5.16 사건 관련하여 옥살이를 했던 저자를 생각해보면 그가 쓴 소설이 계몽적인 색채를 띠고 설정에 다소 허술함이 보이는 것을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지금의 기준으로 당시의 소설을 따져본다는 것이 공평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꾸만 억척스러운 불만이 드는 것은 예술로서의 문학은 시대를 떠나 동일한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과, "소설 알렉산드리아"라는 제목에서 상상했던 감미로움이 완전히 어긋나버린 내 개인적인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문학적인 완성도 측면보다는 시대상을 반영한 참여소설이라는 부분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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