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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태엽감는 새. 문학사상사 2010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4. 1. 7.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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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시드니 샐던의 책을 보는 것 같은 서두였다. 시드니 샐던은 독자의 호기심을 잡기 위해 다소 자극적인, 궁금증을 유발하는 이야기를 책 처음 부분에 넣기를 좋아하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책도 전반적으로 그러한 구성을 따르는 듯했다. 뭘까, 하는 궁금함이 책을 읽는 내내 따라붙는다. 그리고 등장하는 미모의 여성과 성적인 이야기, 자극적이고 잔혹한 장면 묘사,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주인공의 경험담. 이것은 대중적인 작가들이 많이 쓰는 방식이고, 대중이 좋아하는 방식이다. 아마 그런 점에서 하루키의 글은 작품성에서 낮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나도 그런 방식의 전개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책을 단순히 통속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흥미를 유도하는 동시에 그는 사회 속에서 심지어 가족 안에서 고립되어 가는 개인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그 개개인의 단절이 결코 쉽게 해소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그의 소설적 매료는 바로 그 '개연성 없음'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태엽감는 새"에서 등장하는 여주인공(가노 구레타)의 고통은 다소 환상적인-개연성이 없어 보이는-부분이 있다. 그녀는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인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는데, 그 고통이 매우 심하여 그녀는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 그런데 그 고통이 자살을 실패한 이후 갑자기 사라진다. 만일 이런 설정을 작위적인 설정으로 치부한다면 이 소설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그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고통을 이해 못한 작중의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에 머무르게 된다. 가노 구레타는 자신의 고통이 남자친구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함을 한탄한다. 우리 독자 또한 그런 사람 중 한 명으로 머물러야 할까? 하루키 소설에 대한 이해는 작중에서 묘사되는 기이한 현실들을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받아들이는 순간에야 시작될 수 있다.

하루키 책의 인물들은 다소 이해하기 힘들고 엉뚱하다. 그런 주인공을 바라보는 또 다른 '보통의' 주인공은 그 상대 주인공을 이해할 수 없는 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실제로 어느 정도 돕기 위해 다가서기까지 하지만, '결코'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는 한걸음 떨어져서 그 주인공을 바라본다.

여기에 바로 하루키의 천재성이 있는 듯하다. 그가 의도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모르겠으나, 상대 주인공(여자)을 바라보는 그 작중 주인공(남자)의 무뚝뚝함과 개인성이, 바로 그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과 닮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기이한 주인공들에 대해 읽으면서 동시에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소설이니까 가능한,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이상한 여자일 뿐이다. 우리의 그런 거리감은 소설 속에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거리감과 닮아 있고,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자신도 모르게' 책 속의 주인공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 발견은-앞서 '자신도 모르게'라고 강조한 것처럼-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뭐야, 이상한 사람들이잖아'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알 듯 말 듯 한 슬픔이 책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때까지 제가 경험한 아픔이라는 아픔을 모조리 늘어놓으면서 설명했죠. 그렇지만 그는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어요. 진정한 아픔이라는 것은, 그것을 경험한 일이 없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이해될 수 없는 겁니다." (170쪽)

"세계의 끝에 있는 사막 한가운데의 깊은 우물 바닥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지고,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심한 통증이 엄습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 고독한 것인지, 어느 정도 절망적인 것인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거요." (284쪽)

그리고 위의 작중 주인공들의 말처럼, 그들은 상대방이 어떤 태도를 취하기도 전에 이미 상대방이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단정짓는다. 이것에 그들이 지닌 아픔과 소설 주제의 원천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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