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사람들 눈에 우리 독일인은 게르만 돼지다. 이들은 사기꾼처럼 우리를 이용해 먹고 골수까지 빨아먹는다. 깨어나라, 독일인이여!"
이 과격한 발언은 종교 개혁가 루터의 말이다. 성직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쉽게 믿겨지지 않지만 그는 당시 신부의 신분이었다. 우리는 흔히 자연을 가까이 벗하는 사람이나 세상이 보다 멋지게 변하기를 주장하는 사람, 속세를 멀리 하는 사람, 검소한 사람은 인품이 훌륭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사실 인품은 지적 능력이나 생활 방식과는 거의 아무런 상관이 없다. 청빈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개혁을 지지했던 루터였지만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농민 반란이 일어났을 때 오히려 정부(귀족)의 편에 서서 <농민의 살인, 강도단에 항의하며>라는 제목으로 독일 제후들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의 편지를 썼다.
"폭도를 죽이는 사람은 (...)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 따라서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비밀리에 또는 공공연히 때려 죽이고, 목졸라 죽이고, 찔러 죽여야 한다. 그것은 미친 개를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만약 여러분이 이런 투쟁에서 죽는다면, 여러분은 진정으로 축복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보다 숭고하게 죽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자연을 벗하고 세속을 멀리하며 대중을 경계한 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자연과 인간을 사랑하며 자본의 해악을 알고 멀리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활한다고 믿는다. 분명 실제로 그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의 눈에 띄는 건 그 원천에 분노가 서려 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대개 이 분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려진 뒤 원한을 품게 된 사람의 것과 비슷하다. 사랑이 순식간에 저주로 뒤바뀌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갖지 못할 바에 부숴버리겠다고 다짐한다. 공산주의자가 된 좌절한 자본주의자의 망령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지 주의 깊게 살펴 보라. 이 경우 자비심이 아닌 분노가 그들의 생각과 행동의 원천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와 반대되는 의견을 타협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스스로를 자연을 벗하며 사는 도덕적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비심과 관대함을 집어 던져 버렸다. 물론 그들도 자비심을 가지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대개 자신에게 동조해 주는 사람에게 국한된다. 그래서 아주 쉽게, 오늘의 친구를 내일의 적으로 만들며 반대파에 대한 적대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간디는 교육받은 지식인들의 가혹한 마음이 가장 걱정스럽다고 말한 바 있다. 얼핏 보면 간디의 우려는 이상해 보인다. 교육을 받건 받지 않았건 간에 사람들은 마음속에 가혹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받은 지식인들의 가혹함은 충분히 우려할 만한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무기로 가혹함을 설파하고, 지배계급이 되어 가혹함을 지배도구로 삼으며, 자신의 가혹함을 숭고함으로 위장시켜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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