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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이병률 지음 (달, 2012)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4. 10. 16.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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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을 제대로 읽기도 전, 이상한 감정이 나타난다. 


'사진과 글을 함께 실은 책이라는 거지. 페이지 한쪽엔 고풍스러운 장신구, 서유럽풍의 건출물, 신발도 없이 돌아다니는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의 사진을 올려놓고 그 옆엔 한껏 멋부린 자신의 추억담을 끄적여 놓았단 말이지. '바람'과 '당신'이라는 달콤한 제목은 아메리카노를 담은 머그컵 옆자리에 딱 알맞아 보여. 책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라이카 감성의 사진들은 마음의 우수를 자극하고 유럽의 잘빠진 도시 건축물과 얼굴에 가난을 드리운 인물들의 사진은 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제3세계 국민들을 향한 헐한 동정심을 보여주는군.

그래, 그런 책이야. 무겁지 않게, 마치 로맨스 영화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일시적 희망과 위안으로 들뜨게 만들 책. 달콤하지만 너무 많이 삼키면 좋지 않은 말들. 결국 이별도 성숙을 위한 한 단계였다는 식의, 라이프니츠 식의 '현재는 최선의 상태'라는 주장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일시적으로라도 위로가 될 터이고, 결과적으로 잘 팔리겠지.'

내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난 이 책을 완독했다. 어쩌면 이 책은ㅡ처음 들었던 생각처럼ㅡ가난한 자들의 고통과 경쟁에 내몰린 이들의 불안함, 병들고 아픈 사회의 어둠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제3세계의 높은 문맹률을 문명에 물들지 않은 원초적 아름다움으로 위장하며, 우리가 당장 마주해야만 하는 미래의 불안을 아주 잠깐, 아무런 실제적 해결책도 알려주지 않은 채 그저 잠깐 잊게 해주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고독과 슬픔, 위안을 치장하는, 그것을 살짝 덮어놓을 뿐인 치장품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책을 끝까지 읽었다.

세상은 잔인하고 우리의 인생은 무의미하며 사랑은 덧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의 문장과 사진은 감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우리에겐 위안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책이 필요하다. 가끔은, 우린 아주 온전히 유치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다 마음에 맞는 문장 하나 만나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니겠는가.



2.
책을 읽다보면 글쓴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의 지은이도 그런 사람이다. 그의 글을 읽은 뒤 내가 그에 대해 상상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그는 '사랑하면서도 이토록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난 생각한다. 오직 그랬던 사람만이 이런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라고. '사랑하면서 그토록 풍성한' 사람은 이런 책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싫다고 생각한다. 이런 책. 유치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싫었다. 눈이 내리던 날, 그녀를 앞에 두고 이렇게 말한다. 눈이 내리는 만큼 널 사랑해. 너무 유치하다고! 난 또 생각한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유치함만이 사랑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을 듯한 착각에 빠지고 만다. 재지 않을 것. 어린 아이가 말하듯 그런 평범한 단어들만을 연결하여, 거품이 낀 듯, 마치 그 거품이, 허황되고 부풀려진 것일지라도, 진짜 사랑이라도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랑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만이 이런 글을 쓸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사랑하면서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이 세상의 수많은 그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책이 필요하다. 조언을 얻기 위해서? 아니, 동질감을 얻기 위해서.


3.
난 묻고 싶었다. 왜 이런 책의 저자들은 대개 외국의 거리를 돌아다니고, 외국인과 나눈 대화를 화제 삼고, 외서의 표지를 배경으로만 사진을 찍느냐고. 왜 바로 옆에 있는 우리들은 대화의 대상으로 삼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내 스스로 답을 찾아보고자 했다. 


그들은 천성이 외롭다. 천성이 이방인이고 천성이 유목민이다. 단순한 싫증이나 외국을 향한 허망한 동경이 아니라 떠돌고자 하는 천성이 그들을 그곳으로 이끈 것이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곳에 뿌리내려 정착했고, 그래서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것들을 이국적이라 여기게 되었다. 그런데 크게 돌고 있는 유목민의 관점에선 내가 속해 있는 문화와 정서란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했다. 그들은 여러 개로 나누어진 작은 세계들 중 내가 속하지 못한 나머지를 여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머지에 속한 세계가 너무나도 거대하였기에 그들이 떠도는 곳은 지구상의 작은 지역이 아니라 '내가 속하지 못한 모든 곳'으로 간주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난 이 책이 보내는 감성에 여전히 거리를 둔다. 다가오는 것을 막지는 않지만 간격이 너무 가까워지는 듯 싶으면 손을 들어 막는다. 나는 생각한다. 이들이 보내는 감성은 위험하다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그것에 반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감정은 그곳에서 멈추어야만 한다고. 그렇지 못하면 난 이들이 만들어내는 '어쨌거나 해피엔딩'에 갇혀버리게 될 거라고.

그렇지 않은가. 이미 난, 굳이 이 책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만들어 낸 감상적 순간들에 예속되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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