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과 침묵
<검열과 침묵>은 신문이나 TV 뉴스를 꾸준히 보아온, 혹은 정치학이나 신문방송학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낯설지 않은 주제다. 이 주제에 담긴 에코의 생각은 과장법을 다소 쓴 다음 문장에서 엿볼 수 있다: "내가 만약 내일 신문에 나의 부정행위가 폭로될 것이고 그로 인해 심각한 피해가 나에게 닥칠 것을 알게 된다면, 나는 어김없이 제일 먼저 경찰서나 역 인근에 폭탄을 설치하러 갈 것이다. 그 다음 날 신문의 주요 면에는 폭탄 사건이 대문짝만하게 실릴 것이고, 나의 개인적인 경범죄는 뒷면의 작은 기사로 마무리될 것이기 때문이다. 1면에서 기사를 끌어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진짜 폭탄이 설치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184~185쪽)
이것은 어떤 특정 사건이 다른 소음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도록 하는 수법의 좋은 예시다. 방향은 다르지만, 이와 비슷하게 요즘 우리 사회에 퍼지고 있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납치를 당하게 되면 112에 전화를 걸어 납치당했다고 말하는 대신, 청와대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말하라. 경찰 2인조가 당신이 갇힌 곳을 찾아 몇 시간 째 헤매는 대신, EOD를 비롯한 수십 명의 전문인력이 동원되어 감히 청와대를 협박한 당신을 단 몇 십 분 만에 찾아낼 것이다."
상상 천문학
<상상 천문학>은 제목은 천문학이지만 지리학에 대한 내용 또한 많이 다루고 있다. 에코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시대에 볼 수 있었던 다양한 사고와 정신이 중세에 들어서며 잊혀졌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 피타고라스학파의 지동설, 에라토스테네스의 지구 구체 증명은 더 나은 지식을 위한 토대로 발전하지 못한 채 중세시대를 맞이했다. 중세는 경험적 사실에 토대를 둔 묘사가 아니라 상상과 상징에 의한 묘사에 초점을 맞췄다. 예루살렘이 지구의 중심이고 우주는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했다. 중세 뿐만이 아니라 근대나 현대에 와서도 그런 막연한 상상은 지속되고 있다. 데카르트는 하늘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거대한 액체일 거라고 생각했으며, 현대의 몇몇 과학자들은 <우주빙하이론Welteislehre>이나 <지구공동설>을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가 말하는 상상이란 대체로 이런 것인데, 에코는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그런 상상들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막연한 상상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는 토대가 되기도 했음을 역설하고, 그러니 실수에 너그러운 마음을 갖자고 말한다. 그가 언급하는 대표적인 실수로는 지구를 생각보다 무척 작게 상상했기에 서쪽으로 출발하고자 마음 먹을 수 있었던 콜럼버스, 미지의 남방 대륙을 그려 넣은 16세기 지도 덕분에 촉발된 남쪽 탐험과 오스트레일리아의 발견, 사제왕 요한의 편지 등이 있다. 마찬가지로 각종 SF 소설에서 언급되고 있는 기상천외한 이론들도 미래엔 선지적 예언이었던 것으로 밝혀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이런 생각은 다음 문장에도 잘 드러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명제집 주해>에서 (...) 태양은 열기를 생산하지만, 그 자체로는 차가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시로 이끄는 그의 천구 이론을 듣고 웃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저온핵융합을 진지하게 다룬다면 아퀴나스의 생각 역시 주목하여 다시 고려하지 않을까?" (219쪽)
속담 따라 살기
<속담 따라 살기>는 에코가 좋아하는 전형적인 풍자글이다. 풍자의 대상은 속담을 지나치게 자주 인용하거나 속담을 있는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되겠다. 주변에서 "속담에 이런 말이 있으니 내 주장이 맞다"라는 식의 논리는 펴는 사람들을 생각보다 자주 볼 수 있는데, 이 칼럼은 그런 사람들에게 날리는 에코의 강펀치다.
나는 에드몽 당테스요!
<나는 에드몽 당테스요!>는 연재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수법들, 그중에서 특히 아나그노리시스의 통속성을 지적하고 있다. 에드몽 당테스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주인공인데, 이 칼럼의 제목인 <나는 에드몽 당테스요!>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유명한 대사다. 이 19세기 소설의 대사를 요즘의 TV 드라마 대사로 바꿔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L그룹 회장의 아들이요!>, <나는 당신이 버린 아내의 아들이요!> 즉, 독자들은 주인공이 자신이 실제 누구인지를 밝히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희열을 맛보는데, 작가들이 연재소설을 쓸 때 그 수법을 과도하게 사용하여 작품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에코는 연재소설만을 대상으로 하여 이 글을 썼지만, 이 전형적인 수법은 연재소설 뿐만 아니라 자본의 힘이 필요한, 즉 시청률과 판매부수와 티켓 판매량을 중요시하는 대부분의 드라마와 책과 영화에서 쓰이고 있다. 알고 보니 내 남자친구가 (실제) 슈퍼맨이더라, 알고 보니 내 남자친구가 굴지의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더라, 하는 식이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이런 기법은 지금은 물론이고 먼 미래에도 효과적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이런 전형적이고 뻔한 장치에 넘어가는 대중들은 어리석은 것인가? 에코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에게 "격정의 화학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뻔한 수법을 가미한 문장을 읽게 되면 "얼음 같은 심장을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를 것이다"(249쪽)라고 말한다. 그는 대중을 교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자, 이제 우리는 (...) 기쁨과 감동에 자유롭게 빠져들도록 하자. 그리고 연재소설 전체에서 끊임없이 재현되는 전형적인 서술의 다양한 기법들을 만끽하도록 하자."(249쪽)
율리시스, 우린 그걸로 됐어요
<율리시스, 우린 그걸로 됐어요>는 에코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읽고 느낀 "황당무계한 감정"(260쪽)에 대해 토로하는 글이다. 그는 이 칼럼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비평가들의 입을 빌려 조이스의 소설을 평하고 있는데, 인용한 비평들이 그야말로 죄다 악평이다. 이 평들을 보고 있자면 문학계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조이스의 실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들 비평에서 등장하고 있는 몇 가지 단어들은 다음과 같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는 부질없는 시도", "부스러기", "일시적인 현상", "삼류 시인 조이스", "악취미", "충격과 혐오감", "괴물이 사는 쓰레기로 가득 찬 긴 터널", "모든 것을 질식시키는 재", "정신 착란", "천박한 수준의 깊이", 낡은 감상주의", "교묘하고 때늦은 모방자", 부르주아 소설들", 불량한 언어", "병적인 다변증", "반란 행위", "조롱", "무익한 배짱", "사이비 지식인", "쓰레기 소설", "퇴폐주의의 대표주자", "이탈리아의 정신을 음해하는 진정한 위협 요소", "정신병자들", "패배주의로 물든 자들"
독설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이 칼럼을 참조하도록 하라.
섬은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섬은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는 섬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우리가 가슴 속에 품게 되는 이미지를 다룬다. 우린 왜 "섬"이란 말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에코에 따르면 섬의 매력은 육지와의 단절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섬의 매력은 여러 풍부한 설명을 거쳐 다음 문장에서 구체화된다. "성 브렌던의 섬은 존재하지 않는 섬이 아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실제로 그곳에 가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섬이다. 이런 이유로 섬은 충족되지 못한 욕망의 대상이 되고, 그의 전설은 연인 라라를 잃어버린 닥터 지바고의 <짧은 만남>처럼 현실 속 모든 사랑 이야기의 알레고리가 된다. 절망적인 사랑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단 헌 번 다가왔다가 영원히 사라지는 사랑에서 비롯된다."(282쪽)
이 칼럼은 여러 분야의 지식이 화려하게 교차하는 지적 교양의 장이다. 따라서 천문과 지리와 고대 신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이 칼럼의 상당 부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독자를 배려한 그의 해설조차 관련 분야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에, 어떤 독자는 그의 <상세한> 해설조차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에코는 이 칼럼에서 경도 측정 방법을 설명하는데 이때---표준시와 지방시를 구분하지 않은 채 그 둘을 통틀어---단순히 '시간'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는 아무리 이 부분을 반복해서 읽어도 그의 설명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힘을 내시라. 에코가 아주 친절한 선생님이 아니라는 것쯤은 다들 알고 계셨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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