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 옆을 지나가면 언제나 그렇듯 성모 마리아 상이 보인다. 조각에 불과하지만 그 조각에서조차 성모 마리아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8등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얼굴은 흠잡을 데가 없고 군살도 없어 보인다. 꼭 성모 마리아가 아니더라도 어떤 신성적인 존재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를 완벽에 가깝게 상상한다. 그는 가지런한 치열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균일하게 자라 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그들을 그렇게 아름답게 상상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미술가들의 조각가 그림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는 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이 소설의 등장 인물들처럼 모두 눈이 멀어버린다면, 우리는 더 이상 외형의 아름다움에 집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대신 향긋한 냄새나 부드러운 피부에 좀더 관심을 쏟게 될 것이고, 미의 기준도 그렇게 이동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볼 수 없다면, 더 이상 외부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신경쓰지 않게 될 것이 분명하다. 주변에 화장지가 없다면 콧물이 그냥 흐르게 놔둔 채 돌아다니기도 할 것이고, 치아에 뭐가 묻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전혀 신경쓰지 않게 될 것이다. 머리가 눌렸다거나 얼굴에 기름기가 많다거나 하는 것들을 신경쓰지도 않을 테고, 하품도 옆에 누가 있건 없건 입도 가리지 않은 채 있는 힘껏 하게 될 것이다. 더우면 옷도 입지 않을 수 있다. 냄새만 나지 않는다면, 우리 몸에 어떤 오물이 붙어있던지 간에 큰 신경을 쓰지 않게 될 것이다.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볼일을 본다. 이것은 그 사람들이 수용소에 갖혀 있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그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으면 적어도 볼일은 정해진 곳에서---왜냐하면 냄새가 나기 때문에---봤을 것이다(하지만 굳이 꼭 화장실 문을 닫으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시각을 잃는다는 것은 감각 기관 중 하나를 잃는 것이다. 감각. 감각 기관 중 하나가 상실된 사람과 산다는 것은 때로 어려운 일이다. 미각을 잃은 사람이 만든 요리에서 맛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후각을 잃은 사람의 몸에서 항상 청결한 냄새가 나도록 요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 있다. 만일 양심을 마음의 감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양심을 잃어버린 사람에게서 도덕적인 행동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어떤 하나의 감각을 잃는다는 건, 그에 수반되는 행동 양식들을 온전히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소설에서 사람들이 시각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은 그들이 남들에게 보이지 않을 때만 하던 행동들을 아무데서나 떳떳히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 아닌 현실의 우리는 눈이 먼 사람들이 아닌데도, 마치 눈이 먼 사람들끼리 있을 때나 할 법한 행동들을 하곤 한다. 우리가 눈을 뜨고 있지만 눈 먼 자들과 마찬가지라는 말은 이런 것에서 연유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또한 눈 먼 자들의 도시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 도시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라고 강조하거나, 혹은 보고서도 못 본 척 하거나. 그리고 아주 많은 경우에, 우리는 마치 보고도 못본 척 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명백히 기능하고 있는 두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치 그것이 오작동을 하고 있는 양 행동한다. 이로써 한 가지가 확실해진다. 소설 속 주인공인 '의사의 아내'가 우리보다는 훨씬 더 비범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그녀가 몰랐기 때문인지, 아니면 알고서도 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 세상에 살면서도 그녀는---자신의 두 눈을 두꺼운 천으로 묶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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