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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적 변화로 알아 보는 건성유를 이용한 도마 마감과 오일의 산패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20. 2. 20. 02:27

본문

1.

건성유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여러 재료들의 마감재로 쓰였다. 서양에서는 15세기의 얀 반 에이크를 필두로 루벤스, 렘브란트 같은 서양 화가들이 물감에 린시드유(linseed oil), 우리가 흔히 아마씨유나 아마인유라고 부르는 오일을 섞어 유화를 그렸다. 우리 선조들은 방바닥의 장판지와 종이 우산에 들기름을 먹였고 목재 공예품을 칠하거나 가마솥을 길들일 때 들기름을 썼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궁궐의 단청 칠에 들기름을 사용한 기록이 여럿 남아 있다.[각주:1] 이 작업들은 모두 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엔 식용 오일로 칠을 하는데 회의적인 시각이 상당하다. 우선 올리브유나 포도씨유를 비롯한 천연 오일로 도마 마감을 했는데 끈적거리거나 불쾌한 냄새가 나는 등, 잘 안 된다는 후기가 많은 탓이다. 선조들이 사용했다는 천연 마감재인 들기름을 썼는데도 잘 안 된다는 글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식물성 오일로 칠을 하는 것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식물성 오일로 하는 마감은 지식과 재료가 부족했던 시대의 후진적인 행동을 답습하는 거라 비판하기도 한다. 



2.

식물성 오일이 공기 중에 노출되었을 때 일어나는 화학적 변화는 상당수 밝혀져 있다. 우선 식물성 오일은 건성유, 반건성유, 비건성유로 나눌 수 있는데, 이는 유지 내에 존재하는 불포화지방산의 이중 결합 수치를 측정하여 판단한다. 이 수치는 100g의 유지가 흡수하는 아이오딘[각주:2]의 g수로 나타내며, 이 수치가 130 이상이면 건성유라 부른다. 이런 건성유 중에서도 아이오딘 수치가 특히 높은 것에 들기름과 아마인유가 있다.[각주:3] 이들은 불포화지방산의 상당수가 다중불포화지방산으로 구성되어 있어 아이오딘 수치가 매우 높다. 아이오딘 수치가 높은 오일은 공기 중에서 매우 빠르게 산화하며 점성 역시 빠르게 증가한다. 


들기름, 즉 건성유의 점성이 비건성유에 비해 상대적으로 빠르게 증가하는 이유는 건성유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다중불포화지방산의 이중 결합이 구조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불안정한 상태라 빛, 온도 등의 자극에 쉽게 분리되면서 수소를 방출하고 자유라디칼이라 부르는 반응성 높은 상태로 변한다. 자유라디칼은 공기 중의 산소와 매우 빠르게 반응하며 여러 가지 물질을 생성하는데, 최종적으로 라디칼끼리 결합하면서 단단한 구조체를 이루기 시작한다. 이것을 중합 반응이라 한다. 이렇게 형성된 중합체는 연쇄적인 반응으로 점차 커지고 분자량이 늘어나면서 고분자 물질이 된다. 즉 고체처럼 굳는 것이다. 이런 특성이 있기에 건성유를 목재 마감과 무쇠팬 길들이기에 쓸 수 있다.[각주:4] 


따라서 공기 중에서 빠르게 굳는 건성유를 골라 제대로 된 방법으로 칠하면 목재 마감이나 길들이기를 훌륭하게 끝낼 수 있다. 지난 세기의 사람들은 화학적 원리를 알지 못했지만 경험적으로 식물성 오일의 특성을 파악하여 건성유 중에서도 가장 건조가 빨리 되는 오일들을 골라 여러 작업에 이용했다.


마감재를 바르지 않은 도마. 2018. 8. 9.



3.

화학 작용은 동일한 조건이면 동일하게 발생한다. 따라서 건성유를 두 제품에 똑같이 바른 뒤 똑같은 환경을 유지한다면 그 기름은 동일한 속도로 경화된다. 그런데 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포도씨유 같은 반건성유는 물론, 들기름과 같은 건성유를 도마에 발라도 결국 끈적이거나 불쾌한 냄새가 난다고 하는 것일까? 다음과 같은 원인을 예상해 볼 수 있다.


- 오일을 충분히 얇게 바르지 않았다.

- 오일을 동일한 두께로 바르지 않았다.

- 오일을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건조시키지 않았다.

- 도마에 오일을 바른 뒤 직사광선이나 높은 온도에 노출시켰다.

- 오일의 변향을 산패한 냄새로 착각했다.


아무리 건성유인 들기름이나 아마인유라 해도 얇게 잘 펴바르지 않으면 도마 안쪽으로 들어간 오일은 상대적으로 천천히 경화된다. 공기와의 접촉 면적이 적어 중합 작용이 상대적으로 느리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오일은 완전히 굳는 대신 끈적이는 상태로 변하며 불쾌한 냄새를 풍기고 독성을 나타낸다.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한 자유 라디칼은 유지와 반응하며 히드로과산화물을 만들어 내는데, 이 1차 산화 생성물은 높은 온도와 자외선, 금속 등을 촉매제로 분해되기 시작한다. 이 분해 과정에서 독성을 띠며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알데하이드, 케톤, 알코올 같은 카보닐 화합물이 생성된다. 이런 현상을 통틀어 오일의 산패라고 한다.[각주:5] 이렇게 한번 끈적이기 시작한 오일을 자연적으로 완전 경화시키기는 매우 어렵다. 


아무리 도마에 들기름을 얇게 잘 발랐다 하더라도 충분히 건조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위에 기름을 덧바르면 처음부터 두껍게 칠한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처음엔 표면이 완전히 건조되어 잘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내부에서 굳지 않은 채 남아 있던 들기름이 서서히 산패하며 독한 냄새를 풍길 수 있다. 도마 내부로 스며든 기름은 표면에 있는 기름과 산화 조건이 다르니 그런 문제가 며칠 뒤에 나타날지 혹은 몇 주 뒤에 나타날지 알 수 없다. 한쪽은 두껍게, 다른 쪽은 얇게 발라 경화 속도에 차이를 일으킬 때도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또 도마에 오일을 바른 뒤 직사광선이 내리쬐거나 온도가 높은 곳에 두었을 경우에도 마감이 제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 오일의 산패는 실온을 뛰어넘는 높은 온도나 자외선에 노출되었을 때 더 빠르게 일어난다. 


목재 마감은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다. 정교한 손길로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칠해야 한다. 식물성 오일이 아니라 속건성의 화학 오일을 쓰더라도 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마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결과도 좋지 않다. 도구의 사용이라는 게 대체로 그렇다. 오일처럼 중합 방식으로 상온에서 스스로 경화되는 순간 접착제를 생각해 보자. 아무리 강력한 접착제를 쓴다 하더라도 두 물체의 접합부를 강하게 누르지 않은 채 대충 맞대고 있으면 두 물체는 잘 붙지 않는다. 접합부를 아무리 강한 힘으로 누르더라도 두 목재 사이에 톱밥이 끼어 있으면 목재는 쉽게 떨어지고 만다. 이를 두고 접착제 탓을 하기는 어렵다. 건성유를 이용한 마감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도 이런 이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산패 냄새의 착각을 들 수 있다. 모든 식물성 오일은 산패 전에 변향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이때 식물성 오일에서 풋내나 비린내 같은 이취가 난다. 이런 변화는 산패와 다르고 따라서 냄새도 미묘하게 다르다. 하지만 오일에서 이전과는 다른 향이 나다보니 오일이 산패한 것으로 오인할 수 있다. 이런 작용은 오일과 공기의 접촉, 즉 산화 작용 초기에 발생하니, 건성유를 아무리 잘 발라도 결국 산패한다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 



4.

그렇다면 건성유를 이용해 도마에 잘 바르기만 하면 모든 논란이 해결될까? 그렇지는 않다. 식물성 오일의 심각한 유해성 문제가 남아 있다. 올리브유나 포도씨유도 그렇지만 특히 들기름 같은 건성유는 공기 중에 노출된 이후 빠르게 산패하는데 그 과정에서 발암 물질인 카보닐 화합물을 생성한다. 그렇기에 들기름이나 아마인유처럼 빠르게 산패하는 건성유 자체를 마감재로, 특히 '도마'의 마감재로 쓰면 안 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특히 무쇠팬과 도마가 문제시되었다. 무쇠팬과 도마는 음식 재료를 수시로 올려 놓는 도구이므로 인체에 유해한 물질로 길을 들이거나 마감을 해선 안 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오일을 사용해야 안전한가? 일부에선 여전히 식물성 오일을 추천한다. 그러나 도마엔 어떤 식용유도 사용해선 안 되며, 제품에 맞는 전문 인공 오일만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도 있다.


우선 다음을 명확히 해야 할 것 같다. 식물성 오일은 한번 완전 경화되면 더 산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건성유가 산패 전에 완전 경화되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어쩌면 산패가 걱정되어 상대적으로 산패가 느리게 되는 반건성유, 예를 들어 포도씨유나 해바라기유 등을 도마 마감재로 쓰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반건성유는 가정에서 식용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으니 쉽게 접할 수 있고 그래서 마감재로 고민해 봄 직하다. 그런데 산패가 느린 오일은 경화 속도 역시 느리다. 즉 같은 조건 하에서 건성유보다 굳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마감에 실패할 가능성이 건성유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다. 물론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면 포도씨유 같은 반건성유도 도마 마감에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비건성유ㅡ대표적으로 올리브 오일ㅡ로는 도마 작업을 하는 게 쉽지 않다. 올리브 오일은 아주 얇게 발라도 굳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도마에 조금만 두껍게 발라도 시간이 지나면 끈적이며 산패해버릴 수 있다.


포도씨유로 마감한 도마. 2018. 8. 2.



5.

어쩌면 이런 걱정이 들 수도 있다. 건성유는 공기 중에 노출된 이후 빠르게 산패하며 발암 물질인 카보닐 화합물을 생성하는데, 오일이 굳어가는 도중에 이러한 물질이ㅡ비록 많지는 않더라도ㅡ생성된다면 어쨌거나 문제가 있지 않을까? 분명 산패가 어느 정도, 혹은 상당히 진행된 상태에서 경화가 완료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은 마감재를 '먹는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온다. 마감재는 섭취의 용도로 바르는 것이 아니다. 오일이 산패를 했든 하지 않았든, 일단 목재 표면에서 단단히 굳어버렸다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입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다. 중합 반응으로 완전 경화된 들기름이나 아마인유는 플라스틱과 같은 고분자 물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만일 마감재의 섭취 가능성까지 고려한다면 올리브 오일 같은 비건성유야말로 사용 시 유의해야 한다. 특히 도마에 사용할 때 그렇다. 앞서 언급했듯 올리브 오일도 오랫동안 공기 중에 노출되면 점성이 커진다. 그런데 굳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다 보니 적당히 굳은 것 같을 때 도마를 사용하게 될 우려가 크다. 그러면 산패가 상당히 진행된 올리브 오일이 손과 음식에 묻게 된다. 산패된 오일은 발암 물질을 적지 않게 포함하고 있으니 이는 도마 사용의 잘못된 예라 할 수 있다.


마감재가 섭취 용도는 아니라고 하지만 칼로 수시로 내려치는 도마를 생각하면 걱정이 들 수 있다. 칼은 도마에 상처를 내고 막을 갈라지게 한다. 따라서 소량의 카보닐 화합물을 함유하고 있을지도 모를 고분자 물질, 즉 건성유의 파편을 부지불식간에 섭취하게 될 수도 있다.


경화된 오일을 조금씩 평생 섭취하는 일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가 없다. 이는 정당한 고민일 수도 있고 과한 고민일 수도 있다. 다만 이것이 걱정스럽다면 올리브 오일에 야채를 볶는 일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오일에 열을 가열하면 산패가 가속화되고, 자칫 잘못하여 발연점을 넘기면 발암성 물질이 생성된다. 감자를 굽거나 튀길 때 발생하는 아크릴아마이드나 고기를 구울 때 나타나는 헤테로사이클릭아민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도 위험한 발암 물질이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걱정거리가 끝이 없어 보인다. 중요한 건 섭취량과 섭취 기간이다. 우리 몸의 항산화 작용이 얼마나 잘 작동하고 있는가도 염두에 둬야 한다. 



6.

도마에 들기름이나 포도씨유 같은 천연 오일을 바르는 게 좋을지, 아니면 미네랄 오일 같은 인공 오일을 바르는 게 좋을지, 그 선택은 결국 개인의 몫으로 남아 있다. 천연 대 인공의 논쟁은 언제나 답을 내기가 어렵다. 다만 칼을 사용하는 도마에는 미네랄 오일이든 천연 오일이든 아무것도 바르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칠을 하기보다는 사용 후 곧바로 씻은 뒤 물기를 닦아내고 통풍이 잘 되는 그늘에서 말려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도마 관리법인 듯하다. 



참고자료

1. Eunok Choe, David B. 2006. MinMechanisms and Factors for Edible Oil Oxidation. Comprehensive Food Science and Food Safety 169-186

2. Marquez‐Ruiz G, Martin‐Polvillo M, Dobarganes MC. 1996. Quantitation of oxidized triglyceride monomers and dimers as a useful measurement for early and advanced stages of oxidation. Grasaa Aceites 48–53.

3. Kayode F. Adekunle. 2015. A Review of Vegetable Oil-Based Polymers: Synthesis and Applications, Open Journal of Polymer Chemistry 34-40



  1. 대표적으로 <조선왕조실록> 태조 13권 1398년 태조7년을 보면 "궁궐을 고쳐 칠하기를 명하였는데 명유 4백 두를 썼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명유란 들기름에 반응 촉매제인 금속을 일정량 섞은 것인데, 비율 등의 제조법은 전해지고 있지 않다. [본문으로]
  2. 과거엔 요오드라 불렀다. 화학 용어 개정에 따라 현재는 아이오딘이라 부른다. [본문으로]
  3. 식품의약품안전처 <식품공전 해설서> (진한엠앤비 2016) 90쪽 [본문으로]
  4. 반면 이런 특성 때문에 들기름은 빛이 닿지 않는 어둡고 차가운 곳에 보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빠르게 점성이 증가하며 산패한다. [본문으로]
  5. 원론적으로 오일의 산패는 경화, 점성의 증가, 냄새의 변화, 영양소의 파괴 등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설명의 편의를 위해 도마에 바른 오일의 경화와 산패를 구분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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