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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의 프렌치토스트를 돌아보다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20. 2. 21.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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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배를 넣어 만든 프랑스 디저트, '여왕의 프렌치토스트'. 2020. 1.22.

 

1.
마리 앙투아네트가 고향 오스트리아를 떠나 프랑스의 베르사유에 들어왔던 18세기 무렵, 당시 프랑스에서는 간단한 저녁 식사가 유행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모든 인원이 함께 식사를 하는 커다란 주방 대신, 작은 개인 주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프랑스 저택에 전용 식사 공간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전에는 식사만 하는 공간이 따로 없었다. 당시의 식탁은 한 곳을 일정하게 점유하는 물건이 아니라ㅡ우리나라의 소반처럼ㅡ식사를 할 때만 꺼내오는 물품이었다. 

 

그런 분위기에 힘입어 원래 주방이 없었던 베르사유 궁전에도 작고 특별한 주방이 들어섰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성 밖의 '그랑 코묑(Grand commun)'이 아니라 궁내의 특별한 개인 주방에서 요리를 할 수 있었다. <프랑스 미식과 요리의 역사>를 지은 파트릭 랑부르는 이를 두고 잃어버렸던 사생활이 회복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시끄럽고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성문 밖의 그랑 코묑으로 쫓겨났던 주방이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온 시기와 개인 주방이 나타난 시기에는 우연이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것에서 카트린 드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파리로 건너온 것을 떠올리기도 했다. 카트린 드 메디치가 이탈리아에서 데려온 요리 장인들은 프랑스 음식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평을 받곤 한다. 그렇다면 마리 앙투아네트도 카트린 드 메디치처럼 미식의 역사에서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하지 않을까?

 

카트린 드 메디치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데엔 논란이 있긴 하지만, 미식에 있어 프랑스가 이탈리아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요리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서 유럽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프랑수아 1세의 초대를 받아 앙부아즈 성에서 모나리자를 그리고 있을 때, 이탈리아의 요리법을 담은 <프랑스어판 플라티나>는 이미 20판 이상 출간된 상태였다. 그 정도의 영향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삶에서 배제하기 어려운 우연의 결과물들을 고려해보자. 만일 마리 앙투아네트가 30대의 나이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지 않았다면 카트린 드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파리로 시집온 이후 일어난 음식의 헤게모니가 프랑스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을까?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상당한 미적 취향이 있었고 자기만의 정원과 개인 주방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주방을 소유한 것은 프랑스 역대 왕비들 중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음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누리지 못한 가상의 삶에 미식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와 조롱과 몰이해의 대명사가 되었다.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고 했다는 악의적 소문이 대표적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재조명되기 시작한 건 근래의 일이다. 그에 따르면 마리 앙투아네트의 음식은 프티 트리아농에 있는 그녀의 정원에 소박하게 머물렀다. 그런 재조명에 힘입어, 이제 마리 앙투아네트가 맛보았을지도 모를 당시의 왕궁 요리가 그녀의 이름과 함께 작은 책으로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2.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이 붙은 그 책에는 '여왕의 프렌치토스트'라는 요리가 소개되어 있었다. 나는 해당 레시피를 따라 디저트를 만들어 보았다. 따라 만들기는 했지만 내가 만든 그 디저트를 두고 21세기에 만나는 프랑스 왕실 요리라거나 이것이 바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식사 때 먹었던 바로 그것이라 말하긴 어렵다. 그래도 나름의 의미는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만든 음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마리 앙투아네트가 직접 만들었을 거라는, 혹은 맛보았을 거라는 디저트를 만들면서 '17~19세기 베르사유와 유럽 왕실 식탁'에도 관심을 둔다면, 그건 재현에도 관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요리사는 재료의 원산지는 물론, 정확한 사용에도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레시피에 배를 갈아 넣으라고 되어 있다면ㅡ비록 결과물에 큰 차이가 없다고 해도ㅡ배 대신 사과를 갈아 넣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배와 사과는 비슷한 맛이 나는 과일이니 바꿔 넣어도 되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도달하고자 하는 요리 수준에는 저마다의 요구가 있는 법이다. '배가 없으면 사과를 넣으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요리사와 '사과가 배를 대신할 수는 없다'라고 생각하는 요리사 사이에는 좁히기 어려운 간극이 있다. 그런 차이는 특히 어떤 행위가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를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 나타나기 시작한다.

 

현대 프랑스 요리의 거장, 알랭 뒤카스는 18세기의 프랑스 궁정 요리를 구현해 내고자 했던 한 프로젝트에서 레시피뿐만 아니라 당대의 그릇, 복장, 관습까지 재현해 내려고 노력했다. 그는 이를 위해 각계의 전문가를 불러들여야 했는데, 이 대목에서 그는 자신이 너무나 많은 일을 벌인다는 비난을 받았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요리 구현이면 요리에만 집중하지, 왜 다른 것까지 똑같이 재현하려 드느냐는 비판이었다. 현대 회화가 누군가에겐 엉터리 줄긋기에 불과하듯이, 현대 미식이 그들에겐 음식으로 벌이는 고급스러운 장난에 불과했다. 하지만 난 그의 작업을 시종일관 진지한 태도로 바라보았다. 맛이 시각에 영향을 받는다면, 그 요리를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 역시 맛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옷이 단순히 몸을 보호하는 데에 머물러야 하고 음식이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데 머물러야 한다면 우리 예술의 상당수는 갈 길을 찾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런 견해가 나만의 특유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개 우리는 베트남 음식점에선 베트남 음식이,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는 이탈리아 음식이 나올 거라 기대한다. 베트남 음식점에서 주문한 쌀국수에 짜장용 면발이 들어있다면, 면은 다 같은 면이라거나 맛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하기보다는 일단 '무국적' 요리라며 고개를 저을 것이다. 물론 아무 상관없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어떤 것은 결국 '틀렸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할 테지만, '차이'는 그렇게 출발한다. 그 길 위에서, 음식을 맛보며 그를 감각해 내는 우리의 표현은 서서히 다채로워진다.

 

 

3.
내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프렌치토스트를 만들려던 당시, 집에 있는 과일이라고는 사과 몇 개가 전부였다. 난 곧장 마트로 향했다. 잠시 후 내 손엔 마트에서 사 온 노란 배 하나가 들려 있었다.

 

 

참고자료
1. 파트릭 랑부르 <프랑스 미식과 요리의 역사> 김옥진, 박유형 옮김 (경북대학교 출판부 2017)
2. 미셸 빌뮈르 <마리 앙투아네트의 테이블> 오경희 옮김 (경향BP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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