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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정신의학의 권력>, 위로라는 이름의 권력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9. 9. 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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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나, 우울증인가 봐." 우리는 보통 이런 표현에서 의학적 진단의 필요성 여부를 확인하기보다는 의학 용어의 일상화를 읽어낸다. 다시 말해 실제로 자기 자신에게 정신 장애가 있어 그런 말을 했다기보다는 그런 상태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심란한 상태라는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실수를 하다니, 내가 미쳤나 봐" 하고 말했을 때 '미쳤다'를 의학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ㅡ예를 들어 며칠 전 아이를 출산한 아내ㅡ이 그런 표현을 자주 하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자신의 아이에게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라고 말한다면 웃어넘기기보다는 그런 판단을 한 이유를 물어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못 심각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어쩌면, 그는 그저 위로가 필요한 상태일 수도 있다. 일상화된 의학 용어엔 판명하기 어려운 모호성이 퍼져 있다.


만일 우울증을 '병'이라 진단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그 우울증에 걸렸다면, 내가 어떤 기질 때문에 무언가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걸 온전히 내 탓이라 여기지 않을 수 있다. 즉 나는 '나쁜 사람' 대신에 '아픈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병에 걸린 사람은ㅡ다리를 다쳐 회사에 나갈 수 없는 사람처럼ㅡ질타 대신 위로를 받는다. 어떤 결과를 온전히 개인의 노력으로 보기보다는 그가 누린 사회적 지위와 타고난 부의 영향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우리 사회는 그런 경향을 더욱 가속하고 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차라리 우울증에 걸리길 바란다. 그런 정신 장애가 개인의 나약한 정신력 때문에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유전적인 탓이기를 바란다. 우울증이 그러한 병이라면 그 누구도 우울증에 걸린 이에게 도덕적, 윤리적 비난을 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기댈 곳이 없는 이를 위한 마음의 지지대다. 내가 가진 비만이 내 탓이 아니라 유전자 때문이라면 누가 내 비만에 손가락질을 쉽게 가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 내 거친 언설에 공격받아 상처를 입었다는 말을 듣게 되면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죄송합니다. 제가 공황장애를 앓고 있어서요." 아마도 피해자는ㅡ그가 온화한 성격을 지녔다면ㅡ이해의 몸짓을 보일 것이다. 이처럼 어느 정도 가벼운 정신병,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울증 같은 증세는 이제 위로의 표현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심적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너, 우울증인 거 같아"라는 언질은 위로처럼 다가온다. 우울증은 항정신성 의약품의 투여는 물론 전문의와의 상담도 잘 거론되지 않을 정도로 일상화되었기에 괴로운 이의 실생활에 충분한 안정을 안겨준 뒤 사라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주변인 그 누구도 실제로 이 사람이 우울 장애를 겪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쉽사리 따지지 않는다. 그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어떤 행위이다.


이처럼 인간을 대함에 있어 진실보다는 위로가 윤리적으로 권해지고 있다. 오늘날 나는 미셸 푸코의 <정신의학의 권력>을 읽으며 정신의학이 권력을 쥐고 있었던 시대와 현대의 위로 사회가 진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한다. 19세기의 정신의학자들은 광인들을 치료하기 위해 진실을 알려주기보다는 거짓을 채택했다. 즉 자신이 왕이라고 믿는 광인에게 '넌 왕이 아니다'라고 말해주기보다는 그가 진짜 왕인 것처럼 행동하여 치료의 실마리를 발견하고자 했다. 실제로 그것으로 소기의 치료 효과도 보았다. 그러나 미셸 푸코는 정신의학자들이 진실 대신 허위를 택함으로써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진정한' 치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정신의학자들은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권력은 정신 장애를 정의 내리고, 정상과 비정상을 판별하며, 비정상인을 치료라는 이름의 거짓 울타리에 가둬놓고, 의사로의 행세를 가능케 하는 힘이었다.


오늘날 마음에 행하는 위로에서 비슷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까? 광인이 자신을 왕이라 믿었던 것은 진실과 명백히 다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진실의 일면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행하는 위로와는 분명한 차이를 둘 수 있다. 이 두 사례의 비교는 단지 은유적 형태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마음에 행해지는 위로가 아첨에 가깝다는 우려, 혹은 종교인, 이익단체를 포함한 위로의 전문가들이 거짓으로 쌓아 올린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는 문제 제기를 정신의학과 비교하는 것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한계는 마음에 행하는 위로 자체가 언제나 옳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분명 그들은 진실의 전도사가 아니며, 마음이 병든 자들이 있기에 그들의 존재가 의의를 얻는다는 점에서 정신의학자들과 비슷한 면모가 있다. 그런 식으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로의 전도사들은 진실의 일부를 향유한다. 그들은 18~19세기 정신의학자들처럼 모두가 공범이 되는 연극의 무대가 필요하지 않다. 진실의 일부를 무대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정신 장애와 감정의 일시적 변화를 구분 짓는, 우리가 끊임없이 위로의 말에 빠져들며 그것에 만족해 버리는, 절망 속에서도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의 원천을 내어주기도 하는 생의 권력이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은 아마도 그 부근 어딘가에 속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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