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가짜 침대, 예술가의 환영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9. 8. 13. 11:12

본문

아이가 자신의 책을 몽땅 들고 오더니 한 곳에 쌓아 올렸다. 그러더니 그 위에 앉고는 '의자'라고 말했다. 난 아이에게 폴 오스터의 소설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고 알려 주었다. "거기 나오는 주인공은 책으로 의자뿐만 아니라 침대도 만들었어." 그러자 아이는 서둘러 책으로 침대를 만들었고 '나의 조언에 따라' 그 위에 누웠다.

 

이것은 놀이였다. 책으로 만든 의자는 진짜 의자가 아니며 책으로 만든 침대는 진짜 침대가 아니었다. 아이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이는 책으로 만든 의자를 금세 침대로 바꾸어 버렸으며 침대에는 눕는 시늉만 했을 뿐 실제로 잠을 청하지도 않았다. 책으로 된 침대는 완성된 지 채 일 분도 되지 않아 제멋대로 흩어져 버렸다. 

 

아이는 책으로 침대를 만들면서도 그것이 침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자인 나 역시 그것이 침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그 가짜 침대는 나에게 아무런 감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놀이를 했을 뿐이었다.

 

만약 아이가 보통의 아이가 아니라 예술가였다면 어땠을까? 그 예술가는 책으로 침대를 만든 뒤 '침대'라는 제목을 달아 전시할 것이다. 관람자인 나는 어떤 상상에 빠질 것이다. 그 상상은 하나의 환영에 빠지라는 요구이다. 그 환영은 책으로 된 침대가 실재하는 세계 속에 있다. 그렇게 관람자의 상상 속으로 예술가의 침대가 들어오게 된다.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선 상상력이 필요하다. 곰브리치는 '우리의 상상력에 작용'하고 '그 결점을 우리의 상상으로 보충'하지 못한다면 어떠한 예술매체도 제대로 작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예술가가 가리키는 침대를 이해하기 위해선 '책으로 된 침대'라는 결점을 상상으로 보충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놀이를 했을 뿐이었다. 아이는 자신이 책으로 만든 침대를 진짜 침대라 믿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그것으로 환영을 만들어 낼 만큼 창조적이지도 못했다. 나 역시 그것을 응당 가짜 침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가까스로, 난 그 흔적을 알아본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관람자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예술의 이해는 결국 보는 이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그러므로 내가 만약 "아이들은 모두 예술가"라고 했던 피카소의 말을 믿는다면, 그리고 내가 그 어린 예술가를 바라보는 한 사람의 관람자라면, 위의 마지막 언사를 다음과 같이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책으로 방을 어지럽힌 채 떠났다. 하지만, 가까스로, 난 그 흔적을 알아본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내 도움을 필요로 한다. 아이의 이해는 결국 나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피카소의 말대로 아이들은 모두 예술가이다. 그러나 이 명제는 오로지 어른들이 상상하고자 노력할 때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환영이다. 따라서 누군가는 그 환영을 보며 감탄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보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거짓이라 말할 것이다.

 

책으로 만든 침대. 2019. 8.12.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