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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나, 피에르 리비에르> (2), 필요 이상의 공포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9. 8. 13.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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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것이 이 책 <나, 피에르 리비에르>의 전부는 아니다. 연구의 방향은 다양하다. 미셸 푸코의 경우, 그는 의외로 이 책에서 정신의학의 권력보다는 살인자 피에르 리비에르가 주동자이자 범인이며 동시에 저자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당시 프랑스 내외부에서 벌어지던 전투는 "이름 없는 살육에 역사의 각인을 찍는"(389쪽) 행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신문은 그러한 살육이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영원히 이야기될 수 있도록 도왔다. 피에르 리비에르도 그런 현상에서 무언가를 읽어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ㅡ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ㅡ아내에게 고통받는 아버지를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어머니를 살해하였다고 주장하였으며, 그 살인에 역사의 각인을 찍기 위해 스스로ㅡ신문사의 기자처럼ㅡ자신의 수기를 남겼다. 그는 자신의 수기에 제목까지 달았으니 그 이름은 "라 폭트리의 오네 마을에서 6월 3일 발생한 사건에 대해 사건 범인이 쓴 상세한 설명"이었다. 이 제목은 당시 유행하던 삼류 신문 기사의 제목과 상당히 흡사했다. 그것에서 리비에르가 자신의 살인을 보다 위대한 것으로 남기고자 했던 욕망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릇되거나 정당하지 않은 전투를 영웅적으로 회자시키는 신문기사를 본떠서. "다시 말해, 살인의 이야기는 금지와 굴복, 익명과 영웅주의를 교류하게 한다.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행위가 살인의 이야기로 영원성에 도달한다."(391쪽) 그러나 리비에르의 바람과는 달리, 그의 죽음은 삼류 신문의 왜곡된 애가로 남았다.

 

미셸 푸코는 묻는다. 피에르 리비에르가 수기로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고자 했던 행위, 그것을 광기의 유희로 보아야 할까? 당시 배심원들은 피에르 리비에르가 "수기에서도 행동에서도 동일한 이 유희를 행한 것, 수기와 행동의 이중의 주동자였던 것, 그리고 이중의 주체로서 등장하고 있는 것"(397쪽)을 광기의 증거라기보다는 괴물의 증명으로 판단했다. 오늘날 인터넷을 지배하고 있는 '자가' 배심원들의 입장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대개 타인에게서 불행한 내면의 광기보다는 당장 죽여도 시원치 않을 선천적 괴물의 외향을 목격한다.

 

 

4.

피에르 리비에르 사건의 연구자 중 한 사람인 알렉상드르 퐁타나는 피에르 리비에르의 살인 사건 전후에 있었던 프랑스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어려운 농민 현실에 주목했다. 사회의 본질과 구조가 각 개인의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그는 광기를 드러내는 비슷한 사건들이 이 시기에 연달아 일어났다는 것에 주목했다. "사회나 자연의 질서에 위배되기 때문에 규범을 넘어서는 극단적이고 불가해한 범죄(친족 살해, 자식 살해, 피해자의 인육을 먹기 등등)(490쪽)"가 농촌 사회에 나타난 것이다. 역시 농부이며 아주 기초적인 교육만을 받았던 피에르 리비에르는 당시 프랑스 농민들이 처해 있던 비참한 생활상을 드러냈다. 당시 프랑스에 불고 있던 제정파와 왕당파, 그리고 식인주의자라 불릴 만한 자코뱅주의자의 살육 행위와 그로 인한 정치적 소용돌이는 사회 전반에 공포심만을 풀어놓고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도 프랑스의 농민들의 생활은 조금도 나아진 바가 없었다. 농민들을 돕기 위해 시골로 내려간 의사들은 "도처에 보편화된 비참한 상태를 발견하고 몹시 놀"(345쪽)랄 수밖에 없었다. 

 

"그 신체, 그 딱지, 진흙 냄새 나는 피부, 외관, 뼈 또는 살의 종기 등 (농촌을 둘러본) 의사의 이야기를 옮겨 적은 것에 의하면, 이 (농촌의) 인간들은 아직 인간이 아니라 항시 얼마간은 광물, 식물, 동물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346쪽)

 

당시는 부의 불평등이 지극히 심화되어 있어서 서로의 생활을 직접 목격하지 않고서는 그를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서로 다른 차원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런 비참한 생활 속에서 아이들은 빈번히 살인의 희생양이 되었다. 가난은 유아 살해의 변명거리였다.

 

"나 같은 외톨이에 아무런 기쁨도 없고 죽는 편이 나은 인생을 내 딸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352쪽)

 

나는 19세기의 어느 여자가 말했던 언사를 오늘날에도 목격한다. 나는 도시의 빈자들이 갓 태어난 아이를 몰래 버리고 결혼을 피하고 자식을 거부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이들의 행위가 과거처럼 꼭 경제능력으로 유발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능력이 있는 젊은이들도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라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한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결정을 이기적이라 비난한다. 하지만 그들이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을 때,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아이가 오늘날의 피에르 리비에르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사회를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이분법 속에 가두어 둔 채 공포를 지속적으로 조장하면 그 가능성은 놀랍도록 커질 수밖에 없다.

 

당시 검사와 정신의학자 들은 피에르 리비에르가 남긴 수기로 그가 정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수기를 읽은 이들이 거꾸로 결정 불가능성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미셸 푸코는 우리가 피에르 리비에르의 수기를 이해하기까지 한 세기 반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 한 세기 반은 겨우 경계선을 소묘하는 데 필요한 시간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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