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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취집'을 비난할 수 없는 시대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9. 7. 20.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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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분석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은 아름답다. 내가 이 책에 감탄하는 것은 순전히 전문가적인 질투심 때문이다. 이 책은 놀라운 작품이다." ㅡ 폴 크루그먼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1.

경제학 분야에 꽤 큰 열풍을 불고 왔던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많은 객관적 증거와 과감한 통찰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핵심을 간략히 쓰면 '자본주의 경제에서 부의 분배 문제는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라는 것이다. 이는 부의 분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서 자본주의의 초기에 나타난 불평등이 지속적으로 완화되리라고 믿었던 주류 경제학 입장에선 매우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거시경제학자로 불리던 로버트 루카스가 '순수 경제학에 해가 되는 가장 치명적인 유혹은 분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당시 주류 경제학은 분배 문제를 터부시했었는데, 피케티가 부와 권력이 일부 자본가에게 집중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 믿었던 시장주의의 믿음에 타격을 날린 것이다.

 

물론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극심한 불평등으로의 이행'이라는 묵시론적 예언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케티는 자본수익률과 경제성장률이 역사적으로 어떤 추이를 그려왔는지 조사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앞지르지 못했던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20세기에 경험했던 놀라운 경제성장률은 전쟁 등으로 인한 예외적인 상황으로, 그를 제외하면 인류 역사 전반에서 자본수익률은 거의 언제나 경제성장률을 앞섰다는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심각한 불평등으로 나아가게 될 거라는 예측으로 이어지게 된다.

 

만일 경제성장률이 자본수익률보다 높은 수치를 유지한다면 자본주의 체계의 불평등은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세계의 경기가 몇십 년 전의 호황기 수준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낮으며 이미 장기적 저성장 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위해 뒷받침되어 하는 인구도 줄어드는 추세이다. 경제성장률을 높이기 어렵다면 자본수익률이라도 낮춰야 하는데 각국 정부는 예전처럼 높은 세율을 적용하고 있지 않으며 세계화와 무역 자유주의로 조세경쟁까지 심화되고 있어 자본수익률이 낮아지긴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경제가 특단의 제재 없이 이대로 흘러간다면 인류가 극단적인 양극화에 빠질 수 있다고 피케티는 주장한다.

 

 

2.

반대 진영에선 피케티의 이러한 주장이 그럴듯하게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다. 예를 들어 피케티의 주장에 따르면 자본가는 투자를 하기만 하면 곧바로 일정한 수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다는 반론을 펼친다. 성공적인 투자를 해야만 자본도 수익을 낼 수 있는 것인데 피케티가 그 점을 간과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 자체엔 일리가 있다. 도심에 위치한 아파트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소유자가 그곳에서 단순히 거주만 하고 있다면 소유자의 수익은 평균 수익률보다 낮을 수 있고, 소유자가 부채를 안고 다른 곳에 투자를 하더라도 그 투자가 성공적이지 못하면 손해를 볼 수 있다. 이건 당연한 일이다.

 

이런 비판의 문제는 전체적 차원의 문제를 세부적 차원으로 해석하려 한다는 것이다. 양극화가 심화된 세계의 무자본 노동가도 성공을 이뤄낼 수는 있으며 막대한 자본의 소유자라도 실수 한 번으로 나락에 떨어질 수 있다. 자본수익률은 투자 유형에 따라 다르며 수익률은 성공 여부에 따라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 그 점을 피케티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모든 점을 다 고려하기가 '개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케티는 '평균' 수익률을 사용했다. 평균 수익률을 어떻게 계산했는지는 그의 책인 <21세기 자본>을 살펴보면 꽤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런 비판을 한다는 건 비판가들이 그의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비판을 위한 문제제기를 했다는 뜻이 된다.

 

피케티를 향한 적지 않은 비판이 이런 식의 흠집내기 형태를 띠고 있다. 피케티는 자신의 저서 어디에서도 자신의 내세운 핵심 법칙이 절대적이라거나 회피 불가능하다고 한 적이 없다. 피케티가 이원론자나 결정론자가 아니라는 건 그가 지나칠 정도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그의 책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가 역사를 강조했던 건 통계 수치를 빌리거나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비판에서 맥락을 따지지 않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한 가지 위로를 하자면ㅡ굳이 피케티가 아니더라도, 굳이 경제학 분야가 아니더라도ㅡ거시적 차원의 흐름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대개 미시적 차원의 비난에 시달리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3.

'불평등이 대체 왜 나쁜 것인가'라는 비판은 어떨까? 다른 사람이 나보다 훨씬 더 잘 살게 되었다 하더라도 나의 사정 또한 어느 정도 나아졌다면 서로 괜찮은 것이 아닌가? 이것은 거시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인데 피케티는 이에 대한 논의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피케티는 불평등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불평등이 왜 나쁜지, 어느 시점부터 불평등이 문제를 일으키는지 거의 다루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 의문에 피케티가 꼭 답을 내놓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 질문은 경제학이 아니라 철학에 속하기 때문이다. 피케티가 증명하려 한 것은 자본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불평등으로의 질주 가능성이지, 불평등이 해로운 이유가 아니었다. 그러니 불평등에 대한 철학적 문제 제기는 피케티가 아니라 마이클 샌델에게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물론 경제학을 정치학 혹은 철학과 완전히 분리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불평등보다 빈곤 퇴치가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정치경제학자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져 볼 수 있겠다. 불평등을 줄이려는 시도는 왜 불필요한가? 빈곤 퇴치가 어느 수준까지 해결되어야 불평등을 논할 수 있는가? 빈곤층 문제를 해결하면 사회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서민의 삶이 지금보다 한결 나아질 수 있는가?

 

 

4.

생각해 볼 만한 문제는 그의 핵심 논리에 있다. 피케티의 이론을 따라가다 보면 분배는 생산 기여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주류 거시경제학의 기본 원리인 '한계생산성 이론'을 부정하게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계생산성 이론에 따르면 시장에 참여하는 자본이나 노동의 비율이 늘어날수록 자본가와 노동자가 얻어가는 수익률은 가파르게 줄어들어야 한다. 이는 시장에 참여하는 자본과 노동 모두 생산에 기여한 만큼 보수를 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 이론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금과옥조로, 그 이론 덕분에 주류 경제학은 분배 문제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다. 생산에 기여한 만큼 임금이 정해지니 문제될 게 없어 보였다.

 

그런데 피케티는 부가 기여도에 따라 분배되는 게 아니라 자본가에게 집중될 수 있다고 보았다. 자본가의 수익률이 낮아진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게 되어 양극화를 피할 수 없게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볼 의문은 경제성장률이 낮은데 어떻게 자본가의 수익률이 일정 수준 혹은 완만한 하락세를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전술한 대로 거의 모든 경제 모형은 경제성장률이 떨어지면 자본수익률도 하락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피케티는 느리게 성장하는 경제에서는 이미 축적된 과거의 부가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고 보았다. 또한 자본의 규모가 클수록 수익률이 커지는 현상도 저성장 하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자본수익률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라고 보았다. 이에 더하여 피케티는 자본과 노동 간의 대체탄력성이 1보다 크면, 쉽게 말해 기술이 발달하여 기계가 노동자를 쉽게 대체할 수 있게 되면 경제성장률은 낮고 소득 대비 자본 비율은 높은 탓에 경제성장률과 자본수익률의 격차가 더 커지게 된다고 보았다. 여기에 최상위 계층에 해당되는 자본가는 정보 독점이나 정치권력 등의 도움으로 저성장 체제 하에서도 일정한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가정을 더해볼 수 있다. 주류 경제학에서 상정하고 있는 '순수하고 완전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완벽한 시장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언제든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사실 한계생산성 이론은 노동자의 한계생산성을 측정하기 어렵다거나 미국 등 일부 영미권 국가에서만 제한적으로 일어난 최상위 노동소득(슈퍼경영자의 보수)의 폭발적 증가를 설명할 수 없다는 등의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과거 버트런트 러셀도 철도 선로를 바꿔주는 노동자의 예시로 한계생산성 이론의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

 

물론 피케티는 이 모든 상황이 예측 가능하며 회피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심지어ㅡ그의 비판자들의 주장과는 다르게ㅡ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항상 앞서게 될 거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피케티가 경계하는 건 부주의한 낙관론이었다.

 

 

5.

피케티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불평등에 관한 논의를 거의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빈곤층 및 노동자 계급(저학력 노동자)과 중산층 간의 격차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데 피케티는 상위 1퍼센트, 0.1퍼센트 계층의 소득을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자본가들이 감추고 싶어 했던 비밀이 마침내 드러났다고 평했다. 반면 완전히 다른 세상에 속한 자들이 한 해에 얼마를 벌어들이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가 은근히 신경 쓰며 비교하는 대상은 대개 자신과 비슷한 부류라고 생각했던(혹은 믿었던) 계층에 한정될 때가 많다. 따라서 일반 시민들에게 피케티의 걱정은 별세상의 뜬구름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부의 집중이 자본가 몇 사람의 혜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와 정부의 조치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 이 현상을 단순히 투자를 잘하는 자본가, 능력 있는 경영진의 정당한 소득 정도로 취급하기는 어렵게 된다.

 

 

6.

오늘날 일부 결혼 적령기 여성은 '취집'을 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속성이 이끌게 될 피케티의 우려스러운 전망을 보고 있자면 그들의 선택을 비난하기란 꽤 매우 어려워 보인다. 도덕적인 행동으로 보이지 않을 순 있으나 잠재된 위험을 피하고 싶은 심리를 마냥 비난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심리는 진화인류학의 관점에서보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동물학자 아모츠 자하비의 핸디캡 이론에 따르면, 쓸데 없는 곳에 돈을 낭비할 수 있는 사치야말로 그의 매력을 드러내는 잣대가 되는 것이다. 둘이서 부족한 돈을 끌어안고 불행하게 살 바엔 차라리 혼자서 편안하게 살겠다는 독신자들의 선언이나, 결혼을 했으나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며 임신을 거부하는 부부들의 맥락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야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젊은이들이 느끼는 불안한 감정과 마주하고 있는 어려운 현실을 외면한 채 개인의 나약함을 지적하고 만다. 지금 세대는 놀라운 경제성장률을 경험했던 지난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보기에 지난 세대의 낙관론은 부주의하고 무책임해 보이며 그런 무능 때문에 피케티가 염려하는 시대를 그대로 용인하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쉬운 점은 오늘날의 젊은이들마저 상대 진영에게ㅡ예를 들어 다른 성별에게ㅡ나약함이나 게으름 같은 개인적 차원의 비난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취집' 같은 용어는 상대에 대한 적대적 배경에서 탄생했다. 이는 구세대가 현세대에 전도하고자 했던 그 '가르침'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이런 모순을 피하고자 한다면 취집을 마냥 비난만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시대는 취집을 비난할 수 없는 시대, 도덕의 실천을 종용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같은 이유로 피케티의 우려를 이런저런 이론으로 반박만 하려 해서는 안 된다. 몇 개의 결함보다는 전체를 보는 눈이 필요하다. 사소한 논쟁에 휩쓸려 있는 사이, 우려는 현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그리 낮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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