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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정말, 정말 좋았지>, 어른들이 잊은 아이들의 생경한 세계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9. 7. 2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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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영국은 소득 불평등 수치가 영국 역사상 정점을 찍고 있을 때였다. 소득 상위 0.1%가 총소득의 약 11%를 차지했고,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거의 절반인 약 47%를 차지하고 있었다.[각주:1] 조지 오웰이 영국의 기숙학교이자 사립학교인 세인트 시프리언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은 바로 그런 때였다. 당시 그리 부유하지 못했던 조지 오웰의 부모가 부유한 시민 계급이나 들어갈 수 있었던 값비싼 사립 기숙학교에 조지 오웰을 입학시킬 수 있었던 건 그의 명석한 두뇌 덕분이었다. 수필집으로 볼 수 있는 <정말, 정말 좋았지>에서 조지 오웰은 비록 자신이 그 시기에 선생들의 마음에 들도록 '제대로' 행동하지도 못했다고 술회했지만 그래도 성적이 좋았는지 영국의 명문인 이튼스쿨[각주:2]에 진학할 수 있었다. 비상한 머리를 가졌지만 가난한 편이었던 조지 오웰은 이 시기에 부유한 아이들과 섞이면서 극심한 빈부격차와 부잣집 아이들이 지니고 있던 놀라운 속물근성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 시절의 기억을 <정말, 정말 좋았지>에 남겼다.

 

<정말, 정말 좋았지>에서 조지 오웰은 어른들이 아닌 아이들의 시각에서 글을 쓰고자 했다. 어른의 눈으로 내려다본 아이들의 세상이 아니라 당시 아이들이 자신들의 눈으로 올려다보았던 세상을 기록하려고 애썼다. 이 기록은 그래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오늘날 출시되고 있는 아이들 교육서의 상당수가 부모의 시각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식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적인 교육법과 일류대 입학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사례는 희귀하다고 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이 볼 때 아이들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가르침의 당사자인 어른이 자신이 어린아이였을 때의 고된 기억을 까맣게 잊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어른들은 이상하게도 자신도 한때 어린아이였으며 당시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걸 도저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어린이 나름의 고충과 어려움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어른들은 아이를 바라보며 쉽게 "좋은 시절인 줄 알라" 하고 다그치는데 이는 조지 오웰이 보기에 무책임한 발언이다. 아이가 수시로 우는 것은 그만한 괴로움이 있기 때문인데, 그 괴로움을 이해해 주기는커녕 안일한 이기심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말, 정말 좋았지"라는 말은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나 가능하다. 어린아이가 어린아이의 눈으로 볼 때 그 시절은 결코 "정말, 정말 좋았지"라고 할 수 없는 때였다. 

 

조지 오웰은 당시 초등학생 아이들이 지녔던 놀라운 속물근성을 회상했다. 다짜고짜 집의 평수와 하인의 수를 묻고 집사의 여부를 따지며 자동차 전조등이 가스식인지 전기식인지로 부유층의 계급을 나누던 아이들을 생각하며 아이들이 왜 그렇게 자라나게 되었는지를 묻는다. 아이들의 그런 속물근성은 당연히 어른들의 영향이었다. '난 주말이면 별장에 있는 아버지 요트를 타러 가지만 넌 가난뱅이라 그런 건 본 적도 없을 것'이라 말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조지 오웰은 당시의 그로서는 명확히 알 수 없던 까닭 모를 불안을 느꼈다. 그가 사립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몇 주 만에 이불에 오줌을 싸기 시작한 건 갑자기 부모에게서 떨어진 채 이질적인 아이들과 어울려야 했던 심리적 고통과 압박 때문이었을 터였다. 그가 일부러 오줌을 싼 것도 아니었고 온전히 그의 탓이라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불에 오줌을 쌌단 이유로 매질을 당해야 했다. '나는 어른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나쁜 아이'라는 죄의식의 시작이었다. 

어린아이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어려움이 있다. 그들에게 세상은 너무 넓고 모르는 것투성이다. 어른은 너무 크고 무섭고 기이하게 생겼으며 이상한 냄새가 난다. 아이들끼리 섞이기도 쉽지 않다. 어떤 아이는 덩치도 크고 힘이 세서 다른 아이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다. 언어폭력도 남다르지 않다. 폭력에 머리를 숙이거나 대항한다는 선택이 쉬울 리 없다. 이렇듯 그들에겐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우며 그래서 익숙해지기까지 심한 어려움을 겪어야만 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의 고난을 '그깟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 아이가 물을 엎지르면 예상하지 못한 일어 벌어진 것처럼, 마치 다 큰 성인이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책임을 묻는다. 부모는 아이가 육체적으로, 심지어 심리적으로도 당장 어른이 되기를 요구하며 내키는 대로 짜증을 부린다. 그 자신도 '진정한'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일 테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아이에게 그대로 전해질 부작용에 유예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는 그의 모습을 닮아간다. 어쩌면 부모도 그 사실을 깨달을지 모르지만, 깨닫는다 하더라도 불현듯 일어났다 사그라드는 미풍에 그치고 만다. 아이가 반항을 시작하면 자신의 부정적 행위가 잘못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아이의 본성이 나쁘다고, 그런 아이를 만난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긴다. 그러다 결국ㅡ일종의 대가성으로ㅡ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겠다는 일념하에 통제하고 그 통제를 벗어나는 아이들을 '뼛속까지 게으른 식충이자 은혜도 모르는 망나니'로 대한다.

이처럼 대개의 어른들에게 유년의 시기란 '정말, 정말 좋은 시절'로, 어린이들은 그것도 모른 채 까부는 철부지이자 시정과 통제의 대상이었다. "네가 돈을 버니, 직장엘 다니니! 밥 먹고 공부하는 게 얼마나 편한 일인 줄 알아? 얼른 네 방으로 가!"  

나는 조지 오웰의 의견에 매우 동의한다. 아이들 교육이 어려운 것은 우리가 어린 시절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을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떼어 내어 완전히 타자화시킨다. 우리는 그렇게 대우받았고, 그렇게 교육받았으며, 그래서 그렇게 가르친다. 조지 오웰의 말대로 "아이들은 우리가 기억이나 직관을 통해서만 겨우 간파할 수 있는 생경한 심연의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절을 잊는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어린아이들은 곧 자신들의 진실을 어른들에게 숨기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아이들에게 외치게 될 말은 나에게 감히 거짓말하지 말라는 비난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에게 부모는 없어서는 안 될 혈맹이자 증오의 대상인 '적'이었다. 부모는 아이를 지키는 울타리이자 아이를 가두는 한계였고, 아이를 보호해주는 방어막이자 편리할 대로 통제하는 껍질이었다. 아이는  모순을 느낀다.  모순의 충돌이 커질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 증오의 싹이 자라난다.


미래에 아이들은 어떤 환경에 처하게 될까. 지금보다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이에 대해 100년 전 조지 오웰은 "우리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라고 썼다. 오늘날을 돌아보며 100년 후의 나도 이렇게 쓴다. 우리는 결코 확실히 알지 못했다고.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그 과오를 끝없이 반복하며 아이들을ㅡ그리고 여전히 아이로 남아 있는 어른들을ㅡ나와는 '다른' 고약한 철부지로 치부할 거란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더욱 빛난다. 이 혼란 속에서, 이런 책을 통해서나마, 우리는 조금씩 나아가야만 한다.

 

 

  1. 토마 피케티에 따르면,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수치는 1910년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1970~80년에 최저를 기록했다가 이후 급격히 상승하여 2010년대에 들어 다시 20세기 초의 수치로 돌아갔다. [본문으로]
  2. 오늘날의 이튼 칼리지로 13~18세 남학생을 위한 사립 중고등학교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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