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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하나의 악이라는 신자유주의 유령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9. 7. 18.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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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의 지은이는 아파트 공화국, 비정규직, 노동 가치의 훼손, 집단의 계층화, 복지의 빈곤 등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당한 문제를 나열하며 그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지목하고 있다. 지은이는 책에서 모든 문제를 신자유주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회 문제의 상당수가 결국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분노를 애써 감추지는 않았다.

 

신자유주의를 향한 일방적 비난엔 의심스러운 데가 있다. 예를 들어 만일 지은이의 주장대로 학교 폭력이 신자유주의 탓이라면 군사정권 시절엔 학교 폭력이 존재하지 않거나 적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학교폭력이 지금보다 덜하다고는 그 누구도 주장할 수 없다. 오히려 문학과 영화와 증언 들은 당시 학생들이 처해 있던, 지금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비인간적 현실을 보여준 바 있다. 물론 학생들 간의 경쟁이 과도화되면 '왜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선의를 베풀어야 하느냐'라고 묻는 이들이 늘어날 수 있고 그만큼 폭력에 무감각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가 학교 폭력을 증폭시켰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것처럼, 신자유주의가 사라진다고 해서 학교 폭력이 줄어들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학교 폭력을 부르는 변수들은 너무나 많기에 신자유주의가 가속화시켰을 가능성이 있는 몇 가지 단서에 모든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교육의 문제도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 이전에도 고등교육의 문제는 심각했으니 오히려 몇 십 년 전에 비하면 매우 평등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이전부터 존재했던 교육 시스템에 부정적 영향을 가했을 가능성은 높다. 그럼 신자유주의가 사라지면 과도한 경쟁이 사라지고 교육 서비스가 모든 이들에게 공정하게 돌아가게 될까? 학생 선발 시스템과 직업 경쟁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고등교육이 모두 무상화된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거나 기존의 문제가 계속 지속될 수 있다. 가령 숙련도가 떨어지는 교사가 부모 소득이 낮은 계층의 학생에게 배정될 수 있고, 폭넓은 계층에서 학생을 선발했는데도 결과를 놓고 보니 좋은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모여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다. 담론과 현실엔 언제나 놀라울 만큼 커다란 차이가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한다며 아이들을 경쟁 시스템에서 빼내어 대안학교에 보내기 전에, 그런 계획이 사회가 취할 수 있는 다른 좋은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충분히 고민해 보아야 한다. 

 

이처럼 지은이는 병을 찾아냈으나 그가 내린 진단과 처방엔 의문이 남는다. 부의 분배는 19세기에도 중요한 화두였으나 그땐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가격 체계에 존재하지 않는 도덕성의 문제가 신자유주의 이후에야 대두된 것도 아니다. '아파트 공화국'의 문제는 분명히 존재하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신자유주의 때문에 대두된 것이라면 신자유주의 도입 이전엔 아파트라는 공간을 투자 대상으로 보는 일이 없거나 드물어야 했다. 그러나 토지와 지대의 관계는 자본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취급을 받아 왔다. 사회 발전의 여러 역학 관계 하에서 농경지의 가치가 하락하고 도심 부동산이 핵심으로 떠올랐을 뿐으로 그것도 신자유주의 도입 훨씬 이전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2.

자본의 수익률이 생산과 소득의 성장률를 넘어서면 능력주의가 근본적으로 훼손된다는 것은 사실이며 오늘날 그 현상을 금융 제일주의와 투기 현상에서 엿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모든 원인으로 신자유주의를 지적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상속 재산은 신자유주의 이념이 도입되기 몇 세기 전부터 소득불평등과 부의 분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왔다. 즉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는 많은 문제들, 특히 IMF 이후 대두되고 있는 문제들의 원인을 모두 신자유주의로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런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선 신자유주의 이전엔 노동 가치가ㅡ지금과는 다르게ㅡ신성하게 여겨졌었는지, 분배 문제가 원활히 이루어졌었는지, 농민들의 삶은 어땠는지 살펴보아야 했다. 그런 연구 없이 단순히 과거의 어느 특정 시점에 비해 현재의 사회가 많은 면에서 비참하며 그 이유는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한다면 선동적이며 사변적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과거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떠돌고 있다고 했던 마르크스의 이론이 실패한 이유는 산업자본가가 자멸하고 민간 자본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 사회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를 깊이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지은이가 신자유주의는 만악의 근원이기에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신자유주의가 폐지되었을 때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제시해야 했다. 신자유주의만 사라지면 좋아지게 될 거라는 기대는 막연하다. 현대 사회는 너무나 거대하고 복잡하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해외 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더욱 그렇다. 세계화 때문에 부유한 국가의 미숙련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면 이를 개선하기 위해ㅡ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제안했던 것처럼ㅡ가파른 누진세의 적용을 고민해 볼 수도 있다. 문제가 있으면 아예 거부하겠다는 논리를 적정한 해답으로 여기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가 과거의 높은 성장률 덕분에 부의 문제를 소홀히 다뤘던 것은 사실이다. 성장이 둔화되자 과거에 쌓아놓은 일부 계층의 부가 부각되었고 자본수익률까지 높아지면서 자본소득가들과 노동자들 간의 양극화가 심해진 것도 사실이다. 신자유주의 물결과 무역자유화가 가난한 국가의 정부 세수를 감소시키고 그로 인해 해당 국가의 경제발전에 악영향을 끼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중요하다. 다만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하나의 악을 선정하는 일에는 언제나 주의가 필요하다. 우리는 막연한 기대로 출발했던 러시아가, 기술 진보와 생산성 향상을 배제했던 마르크스의 이론이, 수학 이론에 의지했던 경제 이론이 어떤 결과를 맞았는지 알고 있다. 유럽을 떠돌고 있다는 그 유령은 실질적 의미에서도 유령이 되었다.

 

 

3.

사회 문제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계급적 편견과 이해관계에 따라 주관적으로 흔들린다. 그런 힘과 지배관계에 따른 갈등을 책에서 봐야하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런 갈등과 고발은 범람 중인 뉴스 기사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책에서 바랐던 것은 문제 사례들의 나열과 이분법적인 배후 지목이 아니라 갈등관계에 놓인 단체들의 입장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관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이 책의 가치는ㅡ갈등의 완화나 대안의 제시가 아니라ㅡ한 진영에 속한 지식인이 정치적 충돌을 부추기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이해가 되는 측면은 이 책이 출간된 해가 2009년이라는 점이다. 세계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에 신자유주의를 만악의 근원으로 비난해도 마땅한 분위기가 떠돌고 있었다. 문란한 쇼 비즈니스도 신자유주의 때문이고 동네 가게가 문을 닫는 것도 신자유주의 때문이고 이웃간의 관계가 소홀해진 것도 신자유주의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10년이 지난 지금 이 시기에도 모든 책임을 신자유주의에게 넘기고 있다면 우리는 그에 염증을 느끼고 말 것이다. 폐업 가게의 속출, 한국 GM의 군산 공장 철수, 조선업 불황, 청년 실업률의 증가...... 현대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국산 차량이 외제차에 길을 터주고 말았다는 기사까지 나오고 있는 요즘의 분위기는 한 체제, 한 진영에 대한 일방적 비난이 무엇을 해결해 줄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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