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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용 <나의 인생, 나의 학문>, 주석을 달다 (4), 고고학 그리고 이미지의 문제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9. 3. 19.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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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동삼동의 이 해변 주거지에 살던 최초의 주민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석기인들이 틀림없으며, 그 연대는 지금부터 적어도 5천 년 전이다."

 

ㅡ 위 인용문이 쓰였던 1971년 당시엔 저 문장이 옳았을 테지만 지금은 '최초'의 주인이 바뀌었다. 이후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1997년 발견), 양양군 오산리(1977년 발견), 제주도 한경면 고산리(1987년 발견) 등지에서 추가로 신석기 유물들이 발굴되었고,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 신석기인의 주거 지역은 그때마다 변동되었다. 하지만 '최초'의 기록을 달아둔 예전 문서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의 이해에 혼동을 주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신석기 유적지로 인정 받고 있는 곳은 제주도 한경면에 위치한 '고산리'다. 김원용 선생은 해당 저서에서 1971년 당시 부산 동삼동의 패총 유적은 적어도 5천 년 전의 것이며, 그래서 그곳 거주민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석기인들임에 틀림없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양양군 오산리 유적지가 약 8천 년 전의 것으로, 제주도 고산리 유적지는 약 1만 년 전의 것으로 인정 받고 있으니 그간 큰 변화가 있었다. 강원 고성군 문암리 유적지는 오산리보다 이르지만 고산리보다는 늦은 시기의 신석기 유적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다. 굳이 이렇게 줄을 세울 필요가 있나 싶겠지만 인류의 기원을 파악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기도 쉽지 않다. 

 

2017년 8월의 제주도 방문 때 한경면의 고산리 유적지를 찾아간 일이 있다. 그 당시 아내와 난 제주도 방문 때마다 지질 여행을 하고 있었으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지라는 고산리 유적지를 방문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명성과는 달리 고산리 유적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고산리가 다른 곳에 또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찾기가 어려웠다. '고산리 유적'이라는 도로표지판을 따라 갔음에도 길을 잃곤 했다. 그럴 법도 했던 것이, 당시 고산리 유적지는 '최초의 신석기'라는 명성과는 달리 황량하여 볼 것이 거의 없었다. 어렵사리 찾아낸 그곳엔 안내판 두 개와 바닥에 유리를 깔아둔 3평 정도의 전시물만이 처량하게 남아 있었다. 그 옆엔 건축 자재 같은 것들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어 우리나라 최고의 신석기 유적지라는 느낌을 도통 받을 수가 없었다. 

 

제주도 고산리 유적지에 놓여 있던 건축 자재들. 2017. 8.31.

 

 

 

소식을 듣자 하니 얼마 전 그 자리에 작은 규모의 고산리 유적 전시관이 문을 연 모양이다. 그때 내가 보았던 건축 자재는 전시관 건립을 위한 건축 자재였던 것 같다. 근데 규모가 워낙 작은 데다가 전시관의 태반을 휴게실, 화장실, 사무실, 전망대 등으로 채워 놓아 전시관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모양이다. 고산리에서 보자면 양양 오산리의 선사 유적 박물관이 참 부러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19.

"유물의 채집이란 전체 사업의 그저 일부분만을 차지하는 것에 불과하며 우리가 감자밭에 가서 감자를 캐내는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 

 

유적 조사에 대한 열의가 높아가는 것을 기뻐하면서 한편 그것이 단순하고 무도한 동기에서 나오는 유적의 파괴가 되지 않기를 원하기에 마침 부탁 받은 참에 몇 마디 소견을 개진하는 바이다."

 

ㅡ 김원용 선생이 이 소견을 개진한지 10년이 지나 충북 공주시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되었다. 이에 김원용 교수는 발굴단장이라는 막중한 직책으로 무령왕릉 발굴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그 발굴은 과거 일제강점기의 점령국 고고학자가 실시했던 유적 발굴보다도 못한 '17시간'의 졸속 발굴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무령왕릉 발굴은 지금까지도 최악의 발굴 사례로 남아 있으니, 무령왕릉의 발굴단장으로 참여했던 데다가 '발굴로 인한 유적의 파괴'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글까지 남겼었던 김원용 교수로서는 참으로 고개를 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김원용 선생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가 최소한 자신의 분야에서는 실수를 하지 않을 것만 같다. 철저한 원칙주의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과 글은 다르다. 글은 단지 그 사람의 일부를 드러낼 뿐이다. 음악은 음악으로, 글은 글로, 사진은 사진으로, 외모는 외모로 임할 뿐 인성을 크게 드러낼 수는 없다. 노래를 잘부르는 것과 글을 잘 쓰는 것, 사진을 잘 찍는 것과 외모가 아름다운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성실성과 비례를 이루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숱하게 오해를 하고 만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을 곧 선[善]이라 인식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수필을 썼다고 해서, 혹은 글에서 자기 반성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인격적으로 훌륭하리라는 보장은, 그가 사소한 법조차 어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오해를 하고 만다.

 

이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미지의 문제다. 대중문화에서도, 예술과 철학에서도 이미지의 소비를 여러 번 다루었다. 이미지는 표피에 불과하지만 결국 우리는 이미지에 사로잡히고 마는데, 우리는 이렇게 이미지에 쉽게 현혹되는 이들을 가리켜 '순진하다', 혹은 무난한 어법으로 '순수하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 중 순진하지 않은 사람이 있던가? 순진성이라는 평이한 인식을 벗어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범인이라 부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범인에 속한다. 그러니 범인이 몇 번의 실수를 했다 하여 야박하게 구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범인의 실수는 당연한 데가 있기 때문이다. 하기야 범인에 불과하니 타인의 몇 번의 실수조차 용인하지 못하는 것일 테지만.

 

 

20.

"6.25 사변 후 서울 시내에서 수리된 고적 중에 보기 딱한 것이 몇 개 있지만 그 중 으뜸 가는 것이 남대문이다. 서까래가 내려 앉는 것은 고사하고 그 포작에 칠한 채색은 말할 여지가 없다. 이 망측스러운 채색은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남대문을 죽이고 말았다. 이것도 문화재를 애호할 줄 알면서 어떻게 애호할 줄을 모르는 한 예다."

 

ㅡ 지금은 숭례문이라 고쳐 부르고 있는 당시의 남대문은 1960년대에 한 차례 보수 공사를 한 일이 있다. 김원용 교수는 그때의 보수 공사가 엉터리라 남대문을 죽이고 말았다고 토로하고 있다.

 

2008년 불에 타 보수 공사를 끝마친 숭례문도 졸속 공사로 같은 비판을 받고 있는데, 당시 공사 책임자였던 신응수 대목장은 2심에서도 벌금형을 받은 상태다. 1960년대의 남대문 보수 공사에도 참여한 적이 있는 신응수 대목장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건축계의 대표격으로 추앙 받던 인물이었는데, 김원용 교수의 비판에 따르면 신응수 대목장이 참여했던 숭례문은 시작과 끝 모두가 좋지 않은 셈이다.

 

이처럼 부실 공사를 비판했던 김원용 교수가 무령왕릉 발굴은 졸속으로 마치고 말았으니, 비판의 기준을 자신에게도 향하게 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개선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21.

"박물관은 사회 전반의 문화 향상에 공헌하는 중요한 사회교육기관으로서 그것이 해야 할 일은 굉장히 많다. 전시품의 수집, 보관은 박물관으로서 가장 중요한 사업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능동적인 교육 사업이다. (...) 이러한 능동적인 교육, 보급 사업 없이 똑같은 물건을 십 년, 이십 년 진열장에 넣어두고 관람인이 오거나 말거나 오불관언한다면 이것은 고물 진열소이지 박물관이라는 간판을 내걸 수 없다."

 

"외국서는 박물관 하면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가보게 될 만큼 사업이 활발한데 우리나라에서는 박물관은 일생에 한 번 가보면 되는 곳이고, 그것도 못 가본 사람이 많으며 더구나 난방 장치도 없는 박물관에서 입장료만은 또박또박 받고 있는 후진적 상태이다."

 

ㅡ 김원용 선생이 이 글을 기고한 것이 1961년이다. 6.25 전쟁 이후의 근대사를 주로 학교 교육으로 접했던 나는 1961년 하면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없는 불행만 광경만을 연상했었다. 그런데 당시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모든 국민들이 교육도 못 받은 무지렁이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빈농의 자식들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김원용 선생의 저 글만 보아도 내가 상상했던 1961년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흡사 오늘날의 관점이라 해도 믿을 만한 것 아닌가. 

 

1965년에 작고한 수필가 전혜린이 남겼던 글만 읽어 보아도 1960년대의 사회 분위기가 흔히 표현하듯 '참상'과 '무지'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그때에도 유행하는 옷차림이라는 게 있었다. 길거리에 '노란 헤어'가 늘고 있다고, 시민들이 활동성보다는 스타일을 좇고 있다고 지적하던 1960년의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내가 이 시기를 참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학창 시절의 교육은 그때를 오로지 고통과 배고픔의 시기, 부정선거 같은 정치적 혼돈기로 표현하기에 바빴다. 어쩌면 한국전쟁 이후의 고난을 강조해서 그 이후에 일어난 '한강의 기적'을 보다 극적으로 보이게끔 하려는 의도였을까. 사람은 대체로 자신의 고난을 과장되게 표현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니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는 학생들이 국내 근대사를 상당 부분 오해하게끔 한다.

 

 

22.

"어느날 앉아 있노라니까 감사원에서 전화가 왔다고 하는데 수화기를 받으니 다짜고짜로 형사 신문조로 퍼붓기를 "네가 누가하고 짜서 무슨 그림을 50만 원에 샀지?"라고 한다. 내가 관장이 되고 나서 그림을 산 일도 없는데 실로 청천의 벽력이다. 이 전화는 물론 감사원에서 걸려온 것도 아니었고 나는 이제는 누가 걸었는지 대개 짐작하고 있으며,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이었으나 전화받은 순간은 나 자신이 꼭 비료 구덩이에 빠진 것 같았다."

 

ㅡ 저자가 1970년에 쓴 글이다. 보이스 피싱은 '신종' 사기 수법이 아니었다. 

 

 

23.

"언젠가 진열실을 지나려니까 입구 현관에서 서양 부인이 '엉엉' 울고 서 있다. 수위들 앞에서 하도 흥분하고 '엉엉' 울고 있기에 내 방에 데리고 들어와서 알아보니까 자기가 미국의 '클리브랜드'에서 시작해 세계를 한 바퀴 돌았는데 세상에 이런 나라는 처음 봤다는 것이다. '타이' '버마' '필리핀'도 이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김포 세관에서 옷감 한 벌을 유치당한 것에서 시작해 그 까다로운 수속 절차와 무능, 태만에 화가 치밀은 이후 줄곧 사사건건 화나는 일뿐이더니, 이제 최고의 문화기관인 박물관에서도 이런 꼴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꼴인가 하니 덕수궁 입구에서 산 입장권으로 박물관까지 왔더니 표를 다시 사라는 말은 하지 않고 그저 "노, 노"라고 밀어내기만 하더라는 것이다. 그 여자는 그 덕수궁 입장권으로 박물관까지 들어올 수 있는 줄 알았다가 아무 이유 없이 수위들이 밀어내니 절망의 극에 달해서 오십이 된 나이도 잊어 버리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ㅡ '무례'라는 것이 과연 시대의 발전상과 연관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오래 전의 기록과 현재의 불만을 살펴 보면 소위 '젊은 것들'을 가리키는 무례와 교양이 결코 사회의 발전에 따라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저러한 무례와 무능이 타이나 버마(오늘날의 미얀마), 필리핀이 아니라 선망의 대상인 미국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같은 이치로 시골 사람들이 의외로 예의바르다 하여 깜짝 놀랄 일도 아니다. 노인이라 하여 지혜로운 것도 아니고, 못 사는 나라의 인물이라 하여 품격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의 인격은 그저 그 사람에게 달렸을 뿐, 시대와 국가, 지역, 성별, 나이, 교육 수준을 가리지 않는 법이다.

 

 

24.

"고대 미술은 보는 사람에게 끌려다녔고 현대 미술은 작가에게 끌려다닌다는 것이 근본적인 차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고대에는 작가와 보는 사람 사이에 어느 정도의 타협이 있었지만 요사이는 그런 타협은 작가의 타락으로 간주되고 보는 사람들은 그저 끌려다니고 세뇌받다가 그래도 안 된다면 무식한 놈이라고 팽개쳐 버려진다. (...)

 

큰 화판에 줄 몇 줄 긋거나 올챙이 같은 붓자국 펼쳐 놓은 것이 때로 위대한 회화 작품으로 되는 이유를 나는 정말 모르겠다. 그것이 무슨 새로운 공간, 새로운 차원의 창조라고 한다면 물리학이나 기하학에서 다룰 것이지, 왜 미술에서 그것이 평가되고 예술적 가치관으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일까. (...)

 

요사이 그림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자신의 평가가 아니라 남의 평가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 같다. 그렇게 그림 보는 사람은 많은데 뭔가 유행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리 몰렸다 저리 몰렸다 한다. 보는 사람의 권리는커녕 자기 자신의 줏대마저도 팽개쳐 버리는 것이다."

 

ㅡ 흡사 오늘날의 평을 보는 것 같다.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일반의 인식이 꼭 저와 같지 않은가. 인간사엔 언제나 혁신을 추구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이는 예술도 예외가 아니어서 소위 전위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저게 무슨 예술인가' 하는 지적을 들어야 했다. 

 

그러니 김원용 선생의 시각을 탓할 게 아니다. 당시엔 모네의 인상주의 작품도 '저것은 그림이 아니다'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고, 쿠르베의 사실주의 작품도 예술이 아니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도 그 그림에 '전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다. 당시 회화는 사진의 등장으로 큰 변화를 이뤄내야 했고 그 위기감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회화가 현실의 시각을 복제하는 데 머문다면 사진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이것은 또 다른 이미지의 문제다. 이제 회화는 보이는 이미지가 사람의 내면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에 주목한다. 그래서 지금도 현대회화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평을 듣고 있으며 그런 불만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25.

"5월 14일 맑은 하늘 밑에서 돌연 천지를 요동하는 환성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날 피장자의 머리 위치에 놓여 있는 둥근 청동합을 들어내자, 그 그릇바닥에서 광개토왕운운의 명문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광개토왕의 이름은 삽시간에 전 경주 시민을 흥분시켰다. (...)

 

어떻게 이 광개토왕의 제기가 멀리 신라에 와서 고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을까. 아마 이것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운반의 경위는 어쨌든간에 신라와는 특별히 관계가 깊으며 서기 400년에는 신라로 침입해 오는 왜군을 장구격멸한 바로 그 광개토왕의 제기가 1532년 뒤에 경주에서 나왔으며, 그것도 이제 철수 직전의 마지막 일본인이 참가한 고분 발굴에서 출토했다는 것은 무슨 기적과도 같은 이야기였다."

 

ㅡ 김원용 교수가 언급하고 있는 '광개토왕운운의 명문'은 청동 그릇의 바닥에 쓰여 있던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의 16자를 가리킨다. 을묘년(415년)에 광개토태왕을 추모하여 만든 열 번째 그릇이라는 뜻이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고구려의 무덤으로 보이는 고분이 출토되었다 하여 당시엔 꽤나 떠들썩했다고 한다.

 

김원용 교수는 광개토왕의 제기가 신라 고분 안에 들어가 있는 이유는 영원한 수수께기로 남을 것이라 했는데 과연 아직까지도 그 의문이 명확히 풀리지 않고 있다. 청동그릇의 명문 중 '을묘년'은 광개토왕이 죽은 지 3년째가 되는 415년(장수왕 3년)이 되므로 발굴 당시엔 이 고분(호우총)을 415년 경의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으며, 그래서 당시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신라의 왕자 '복호'가 광개토왕의 제사 때 쓰던 그릇을 신라로 가져온 것이 아닐까 했는데, 고분에 있던 다른 유적들이 신라의 5세기경 유물과는 모습이 영 달라 무덤의 주인은 아직까지 밝혀지고 있지 않다. 아무래도 복호가 아니라 복호의 후손 중 한 명이 무덤의 주인인 것 같다고 한다. 주인이 밝혀졌다면 고분의 이름도 '총'아니라 '릉'으로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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