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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 도구로 생각하다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9. 2. 17.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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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역에 있는 한 대형 마트의 주방코너에는 내가 한동안 머뭇거리며 살까말까 고민을 했던 주방도구가 하나 있었다. 비슷한 용도의 물건대에서 보자면 다소 비싼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13,500원밖에 하지 않던 그 제품을 사는 데 실로 몇 달이 걸렸다. 그건 나를 20세기 초 영국 에드워드 시대의 주부로 돌아가게끔 해줄 노란색의 원뿔형 폴리프로필렌 스퀴즈로, 레몬즙을 짜낼 때 쓰는 도구였다. 당시 난 레몬을 사와 그 즙을 짜내곤 했는데 손아귀의 힘으로만 즙을 짜내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즙을 제대로 짜내지 못한 채 그냥 버리는 부분도 상당했으니 나의 관심은 절로 레몬 스퀴즈를 향했다. 문제는 그 도구를 사용할 일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몇 번 쓰고 나면 잊힌 채 방치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몇 달을 망설이고 있자 아내는 필요하면 그냥 사는 게 낫겠다고 말해주었다. 내 오랜 고민에 방점을 찍어준 셈이었다. 덕분에 레몬 스퀴즈는 지금도 부엌 서랍 안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의 염려대로ㅡ수십 개의 레몬을 한 차례 대거 짜낸 뒤ㅡ그 뒤로 죽 잊힌 채 말이다.


도구가 중요함에도 관심이 덜한 이유는 그것을 자주 쓰지 않을 거라는 의심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쓰지 않게 될 물건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강하다. 어쩌면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경각심이 생각보다 깊이 내면화되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때론 경각심이 지나쳐 물건 소유 자체를 죄악시 하는 일이 생겨나곤 한다. 대표적인 것이 책이다. 책에는 지식을 향한 질시과 동경, 그리고 결국 먼지만 쌓이게 될 거라는 우려가 뒤섞여 있다. 옷이나 구두, 자잘한 액세서리 들도 그런 취급을 당하곤 하는데, 이들은 인간의 과시욕을 외부에 드러내는 수단이라는 점 때문에 논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흔하다. 근래의 사회는 인간의 과시적 심리를ㅡ과시의 대상이 정신이 아니라 물질에 관련된 것일수록 더욱더ㅡ너그럽게 용인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에 어떤 남자가 여자를 향해 '당신은 옷이 너무 많은 것 같아'라고, 혹은 어떤 여자가 남자를 향해 '당신은 쓸데없이 비싼 차를 몰고 있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주방 도구는 대우가 다르다. 이들은 과시의 대상이 되기 어렵고 지적인 욕구의 대상이 되어주지도 못한다. 그래서 가지고 있으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구입을 망설이게 된다. 만일 그 도구들이 외부에 과시를 하는데 도움이 됐다면 비록 사용 빈도가 떨어지더라도 구매를 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우리는 주방 도구들이 과시성이 부족하여 구매 욕구가 떨어진다고 말하기보다는 사용 빈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사지 않는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사용 빈도가 떨어지고 주방 일을 편리하게 도와주지 않음에도 우리가 적극적으로 구매하곤 하는 대표적인 물건에 바로 원목 빵 도마가 있다. 나이테가 예쁘게 나 있고 기름칠을 하여 반짝거리는 빵 도마는 요리를 자주 하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쯤 갖고 싶어 하는 주방 아이템인데, 그 이유는 단연 보기에 좋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원목으로 된 빵 도마를 갖고자 하는 나의 욕구는 실현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와 비슷한 가격대의 못생긴 빵 반죽기를 구입하고자 하는 나의 욕구는 한없이 미뤄질 가능성이 높다. 빵 반죽기가 나의 제빵 생활에 일대 혁신을 가져올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자주 쓰지도 않을 거면서'로 시작하는 빈도의 문제는 그 혁신을 끊임없이 미루고 만다. 주방도구 하나를 사기 위해 몇 달을 마트에서 뭉그적거렸던 그때처럼. 하지만 이런 고민이 단순히 사용 빈도에서, 과시성에서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2.

실로 좋은 칼 하나만 있으면 요리 재료를 어떤 모양으로든 잘 잘라낼 수 있다. 문제는 익숙해지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눈길은 때로 슬라이서나 푸드 프로세서를 향하기도 했다. 슬라이서 하나만 있으면 초보 주부도 베테랑 셰프 못지않게 동일한 간격으로 야채를 썰어낼 수 있다. 슬라이서에 능숙해지면 볶음밥 재료도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 푸드 프로세서는 말 그대로 신세계다. 슬라이서보다도 훨씬 편리하여 실로 '해방'이라는 단어와 어울린다. 실제로 푸드 프로세서는 '해방'이라는 단어와 어울려서 쓰일 때가 많다. 


그런데 왜 하필 '해방'일까? 주방 도구를 '해방'과 연관 지어 사용하는 사람은 주방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주방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입장이 조금 곤란하다. 그는 슬라이서는 날이 많아서 다치기 쉬우며 그래서 씻기 어렵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푸드 프로세서 역시 세척에 손이 많이 가고 그래서 재료의 양이 적을 땐 효율이 떨어지는 데다가 매우 시끄럽기까지 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불편해질 것이다. 


도마 위에서 칼로 야채를 썰 때마다 우아하게 퍼져나가는 또각 소리는 마음의 심연을 건드리는 데가 있다. 그 소리는 등장한지 수십 년에 지나지 않은 날카로운 모터 소리와는 아주 다르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탓에 우리 유전자에 각인되었을지도 모를 칼과 받침의 그 부드러운 울림은 나를 실로 요리사가 된 듯한 느낌으로 이끈다. 하지만 최첨단 믹서기로 야채를 갈고 있을 땐 난 그저 요리 세계의 표층에나 존재하는,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그저 그런 소비자가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마치 자판기 앞에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다. 그때의 난 커피의 소비자일 뿐 향유자가 아니다.


우리가 주방 도구의 구입을 두고 망설이는 것은 단순히 사용 빈도 때문만이 아니다. 더 깊은 곳엔 도구의 미학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어느 날 푸드 프로세서가 고장이 나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제빵기가 작동을 멈춘다면? 단순한 칼은 날이 무뎌지면 숫돌로 갈아내기만 하면 된다. 숫돌이 없다면 오래된 가죽을 대용으로 써도 되고 그마저도 없다면 코팅된 잡지의 표지를 임시방편으로 사용해도 된다. 연마사처럼 칼을 잘 갈지는 못하더라도 약간의 작업만으로도 그럭저럭 쓸 만하게 다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기계는 이야기가 다르다. 만일 우리가 기본적인 도구에 익숙지 못하다면, 기계가 작동을 멈추거나 사라지자마자 요리 재료를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하던 태초의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게다가 값비싼 주방 기계를 사고 나면 그 기계값을 보상받기 위해 하지 않아도 될 요리에 매진하고 마는 경향이 생긴다. 부엌에 사놓은 커다란 기계를 써먹기 위해 억지로 주방 일에 끌려가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더 깊은 곳에는 아주 단순하고 오래된 도구들에 대한 열망이 있다.



3.

아내는 도쿄에서 사온 날붙이가 너무 날카롭다며 사용하기를 두려워했었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새로운 칼 대신 기존에 쓰던 뭉툭한 칼만을 사용했다. 그러던 아내가 요즘엔 사용하는 칼을 바꾸었다. 내가 항상 물기를 정성스레 닦아주는 그 칼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 그 위협적인 도구를 사용해야만 한다. 혀가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하여 혀를 묶어버릴 수는 없듯이, 칼이 날카롭다 하여 그를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문제는 사용법에 관한 것이다. 부드러운 혀가 사람의 마음을 녹이듯 날이 잘 서 있는 칼은 요리를 즐겁게 해준다. 무덤덤한 혀는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이 없겠지만 뭉툭한 칼처럼 재료를 제대로 썰지 못한 채 짓누르고 만다. 사용하는 법을 익혀야 하는 것은 혀나 도구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기본을 잊고 만다. 너무나 간단하여 배울 필요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려한 언변과 버튼 하나면 요리가 완성되는 주방 도구에 이끌렸다가 어느 순간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물론 처음으로 돌아가진 못한다. 그저 막연한 기대와 떨림과 흥분이 있을 뿐이다. 출발점으로 되돌아 온 것을 눈치나 챌 수는 있을까?


갓 태어난 둘째를 바라보며, 어느 정도 큰 첫째를 생각하며, 내 아내에게 미안해하며 난 생각하는 것이다. 출발점에서 내가 다시 보게 될 것,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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