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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주석을 달다 (3)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9. 1. 22.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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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검진은 단순히 마마를 앓는 사람을 찾기 위한 것이었고, 일반적인 건강 상태를 전혀 살펴보지 않았다. (...) 가슴에 붉은 발진이 덮여 있는 것이 보였고, 나는 (...) 그것이 마마가 아닌가 하고 더럭 겁이 났다."

 

ㅡ 마마는 천연두의 이명으로,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질병이다. 지금껏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천연두로 사망했다. 아스텍 시절, 2,000만 명에 달했던 멕시코의 인구가 160만 명으로 곤두박질친 것도 스페인의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라 천연두 때문이었다. <총, 균, 쇠>의 저자에 따르면, "미국의 백인들은 '호전적인'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몰살시킬 목적으로 천연두 환자가 쓰던 담요를 선물하기도 했다."[각주:1] 아스텍인들에게 천연두 면역력이 없다는 걸 알고는 무기로 이용한 것이다. 그만큼 천연두는 무서운 전염병이었기에 소설 속의 주인공이 특히 마마를 겁내고 있다. 

 

 

18.

"형편없는 음식점의 가장 확실한 표시는 외국인들만이 드나든다는 것이다."

 

ㅡ 정확히 표현하면 외국인이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19.

"그는 노인이 일하는 것을 보면 "제기랄, 저 노인네가 신체 건강한 사람들 일 못하게 만들고 있네."라고 했고, 또 그것이 소년이라면 "저 어린놈이 우리 입으로 들어갈 빵을 빼앗고 있어."라고 했다. 그에게는 모든 외국인들이 "저 망할 놈의 데이고"[각주:2]였다. 왜냐하면 그의 이론에 따르면 외국인들이 실직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었다. (...)

그렇지만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천성이 관대하고 마지막 남은 빵 부스러기도 친구와 나눌 줄 알았다. (...) 그러나 2년 동안의 빵과 마가린 식사가 그의 수준을 가망 없이 낮춰버렸다. 그런 불결한 모조 식품으로 생활한 나머지 그는 정신과 육체마저 열등한 재료로 구성되어 버렸다. 그의 인성을 파괴한 것은 영양실조일 뿐이지 타고난 악덕이 아니었다."

 

ㅡ 1930년대의 상황이 지금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놀라울 것이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계급 간, 계층 간, 민족 간의 혐오가 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지금도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주요 지지층은 그의 반 이민정책에 긍정적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불안 심리를 키운다고 보는 것이다. 러스트벨트의 백인 노동자들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대표적 지지층인데 이들은 일자리를 매우 중요한 이슈로 여긴다. 민주당의 유색인종 지원이 백인 서민층에 역차별을 가하고 있다고 느낀 러스트벨트의 노동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하게 된 것이다. 정치인들은 그런 자본, 성별, 계층 간의 대결을 교묘히 활용해 자신들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술수가 무척 뛰어나다.

 

조지 오웰이 부랑자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그의 정치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어떤 국가에서 빈민 구제에 힘쓰는 것은 돈이 남아돌아서가 아니라 조지 오웰의 바로 위와 같은 이해ㅡ가난이 인격을 파괴한다ㅡ가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국가는 빈민을 구제하기보다는 격리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런 국가들은 가난을 나태와 탐욕의 증거로 본다. 따라서 빈민들을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천성인 나태와 탐욕으로 인해 다시 가난으로 떨어질 게 뻔하므로 도와줄 이유가 없다고 여긴다. 국가의 경제가 악화될수록 이런 시각이 우세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진보적인 시각에서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가난이 그들을 그토록 이기적으로 만든 것이다. 문제는 어느 정도의 부를 이기심과 이타심이 나누어지는 척도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이다. 독실한 종교인들은 자신의 숙식을 간신히 해결할 정도만 되어도 타인을 생각할 것이고, 평범한 시민들은 집 한 채와 차 한 대, 일주일에 평범한 외식 두세 번, 일 년에 한 번의 해외여행, 노후를 대비할 연금 정도는 준비가 되어야 타인을 생각할 여유가 생길 것이다. 탐욕스러운 부자들은 10억의 부동산과 5억의 현금을 보유하고도 남을 생각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 간의 경계를 나누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20.

"나는 런던을 무수하게 와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날까지 런던에서 가장 나쁜 점의 하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앉는 것조차 돈이 든다는 사실이었다. 파리에서는 돈이 없고 공원 벤치도 없다면 길바닥에 앉으면 된다. 런던에서는 길바닥에 앉으면 어떻게 되는지 하늘만이 아시는데, 아마 감옥에 갈 것이다."

 

ㅡ 난 이 단락이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조지 오웰은 왜 길바닥에 앉으면 감옥에 가게 되는지를 설명해 놓지 않았다. 얼른 추정 가능한 것은 지정되지 않은 곳에 앉는 행위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부랑자처럼 보이는 사람이 길거리에 앉아 있으면 도시의 미관을 해치기 때문에 발견 즉시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보내 버렸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17~18세기의 전 유럽에 퍼져 있던 강제 수용의 열풍이 이 시기의 런던에는 아직 남아 있었단 말인가? 당시 유럽인들은 광인뿐만 아니라 부랑자, 방종한 자들 역시 모두 감옥에 보내버렸는데, 일할 능력이 없는 자들을 미치광이 비슷하게 취급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가난은 '광기'의 결과였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광기와 감옥에 대한 방대한 글을 남겼는데, 그의 글에 따르면 당시의 "모든 기독교인은 (...) 가난한 사람을 동정심의 원인인 물질적 빈곤 때문이라기보다는 혐오감을 자아내는 영적인 비참함 때문에 국가의 쓰레기 같은 존재"[각주:3]로 보았다.

 

몇 달 전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정치인들이 길바닥에 앉거나 누우면 벌금을 물리는 조례안을 내놓아서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이를 보면 20세기 초의 런던에 그런 비슷한 종류의 법이 있었을 거라고 가정하는 게 어렵지는 않다. 지금도 그러한데 인권이 바닥이던 시절엔 오죽했겠는가. 당시의 런던 경찰은 단순히 "빈둥거린다는 혐의로 떠나라고 명령할 권리"[각주:4]가 있었다.

 

길바닥에 앉는 행위가 교양 없는 것으로 취급되는 건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공원 같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면 길바닥에 앉는 법이 거의 없다. 얼마 전 TV에서 방영했던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라는 프로그램은 외국인이 우리나라 도심을 걷다가 길바닥에 주저앉는 모습을 굉장히 놀라운 시각으로 관찰했는데, 그 프로그램은 그 외국인들을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다르게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외국인이었기에 그런 후한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벤치가 없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다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길바닥에 앉았다고 생각해 보라. 그 사람이 평범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기보다는 주위를 신경 쓰지 않는 특이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건 내 경험담이기도 하다. 음악에 심취해 있던 대학생 시절, 난 음악 동아리 회원들이 모두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다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길바닥에 주저 앉은 적이 있다. 언제 올지 알 수도 없는 버스를 뭐하러 힘들게 서서 기다리나, 하는 게 내 생각이었는데ㅡ이 또한 젊음의 특권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있었다ㅡ한 여자 후배가 조심스레 내게 다가와 말했다. 보기에 이상하니까 그렇게 앉아 있지 마시라고 말이다. 

 

어떤 이들은 자유롭게 사는 데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기 위해선 그 누구도 쉽게 지불할 수 없는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21.

"이 안에서는 흑인과 백인까지 모든 인종이 평등한 조건으로 어울렸다. 거기에는 인도인들도 있었고, 내가 그중 한 사람에게 서툰 우드두어로 말을 걸었더니 그 사람이 나를 "툼"(tum)이라고 불렀는데, 여기가 인도였다면 부르르 떨게 할 말이었다.

 

ㅡ "툼"(tum)은 친한 친구 사이에서 혹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이다. 당시 인도는 영국에게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고 그래서 영국인에 비해 상당한 차별을 받고 있는 상태여서 영국인을 함부로 '너'라고 부를 수 없었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이 영국이었으니 망정이지 인도였으면 그 인도인이 어떤 대접을 받게 되었을지 알 수 없는데, 조지 오웰은 그런 인종차별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22.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가끔씩 길바닥에 나체화 모작을 그렸어. 처음에 그린 곳이 (...) 교회 앞이었어. 검정옷 차림을 한 사람이, 아마 교회 위원이었는지 그랬나 봐, 미칠 듯이 화를 내면서 밖으로 나왔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집 앞에서 우리가 그런 외설을 받아줄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 사람이 소리치더군. 그래서 그림을 물로 씻어 지웠지. 그 그림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모작한 것이었어. 또 언젠가 강변 둑길에서 똑같은 그림을 모작했지. 지나가던 경찰관이 그 그림을 보더니 아무런 말도 없이 그리고 걸어가서 크고 편평한 구둣발로 문질러 지우더라구."

 

ㅡ 교회의 간부가 나체화를 보고 성을 내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교회는 음란한 것을 거부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 길거리의 화가가 그린 것은 단순한 누드화가 아니라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모작한 것이었다. <비너스의 탄생>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르네상스 회화의 걸작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보티첼리의 그림은 제목부터 '비너스'의 탄생이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비너스는 이교도의 신이다. 어떻게 이교도의 신이, 그것도 나체의 모습으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버젓이 그려질 수 있었을까? 미켈란젤로도 수많은 나체의 형상을 그렸지만 보티첼리처럼 이교도의 신을 미화하여 그리지는 않았다. 그러니 보티첼리는 화형까지는 아니더라도 파문을 당하거나 아니면 저 위의 길거리 화가처럼 교회 간부의 지적을 받은 후 자신의 그림을 스스로 지워버려야 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신플라톤주의와 연관이 깊다. 이제 신플라톤주의는 사라졌지만 나체를 터부시하는 건 여전하여 근대에는 마네와 쿠르베를 위시로 많은 화가들이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서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진화와 진보를 자랑하는 오늘날도 다를 바는 없어서 몇 년 전 러시아는 시내에 설치되어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스상에 바지를 입힐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주민투표를 실시했으며 중국의 CCTV는 다비스상을 방송에 내보낼 때 성기 부분에 모자이크 처리를 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집은 그런 외설을 받아줄 수 없다고 했던 당시 교회 간부의 입장을 이해해 보도록 하자. 어쨌든 그는 누드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벌금형에 처해지거나 감옥에 수감되지는 않았으니 근래의 현실보다는 나은 셈이다. '네 몸은 그 자체로 음란하며 네 몸은 그 자체로 죄악이다'라는 코드는 우리 저변에 널리 퍼져 있고 결코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23.

"걸인의 사회적 지휘에 관해 해둘 말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들과 교제를 하고 그들도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사회가 그들에게 보이는 이상한 태도가 문득 떠오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걸인과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걸인들은 별개의 인종이고, 범죄자나 매춘부처럼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일하는 사람들은 "일"을 하지만, 걸인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 걸인은 기생충이고 본질적으로 무가치하다. (...) 걸인은 사회적 궂은살에 불과하여, 지금은 세상이 자비로운 시대이기 때문에 관용을 받을 뿐이지, 본질적으로는 경멸할 만한 존재이다. (...)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걸인은 왜 경멸당하는가? 실제로 걸인은 보편적으로 경멸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걸인들이 웬만큼 생활비를 벌지 못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일이 유익한가 무익한가, 생산적인가 기생적인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요구되는 것은 그 일이 수익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뿐이다. (...) 돈은 미덕의 주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 기준에서 걸인은 낙제이고, 이것 때문에 그들은 경멸당한다. 구걸을 해서 일주일에 10파운드라도 벌 수 있다면 걸인은 즉각 남부끄럽지 않은 직업이 될 것이다. (...) 걸인은 대부분의 현대인들과는 달리 명예를 팔지 않는다. 다만 그는 부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직업을 선택하는 실수를 한 것뿐이다."

 

ㅡ 전술하였듯이 17세기의 유럽은 걸인들도 마구 잡아들여 감옥에 가두었다. 당시의 걸인들은 범죄자, 특히 미치광이와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조지 오웰의 시대에 들어서 걸인들은 감옥에 수감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미치광이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조지 오웰의 분석처럼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현상에 다시 한번 주목하는 이유는 근래 들어 '가정주부'에게도 비슷한 징후가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가정주부는 돈을 벌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취급을 받지 못했다. 다만 몇십 년 전만 해도 가정 노동은 상당히 고되었고 동시에 여러 아이들을 돌봐야 했기에 수익은 내지 못하더라도 나름의 인정을 받는 편이었다. 

 

그런데 최근 가정주부를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변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얼핏 보면 가정주부의 형편이 놀랍도록 좋아진 것이다. 예전처럼 시집살이하지도 않고 애를 많이 낳지도 않으며 아예 낳지 않는 경우도 많다. 가정 기기들이 놀랍도록 발전하여 자동 청소기와 세탁 건조기 등의 도움으로 손쉽게 집안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가정주부는 할 일이 별로 없는 참 손쉬운 직업이라는 경멸 섞인 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상대적인 것이다. 바깥일에도 쉬운 일이 있고 어려운 일이 있는 것처럼, 반찬을 매번 사먹으며 편하게 가정일을 하는 주부들도 있는 반면, 집안을 매일 쓸고 닦으며 반찬을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가정주부들도 있다. 기기의 도움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예전엔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을 지금은 신경 써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도 하다. 하녀와 다를 바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이 고되었던 60~70년 대의 서민 가정주부와 비교하여 지금의 가정주부가 상대적으로 편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20세기 초의 청소년 노동자들을 가리키며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행복한 줄 알라고 훈계하는 것처럼 비교의 대상이 잘못되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정일은ㅡ마치 현대의 전산 보안 업무처럼ㅡ문제가 터지고 나서야 그 일의 다양성과 중요성을 알 수 있는데, 일단 문제가 터지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질타가 쏟아지고 만다. 가정이 다시 평상시로 돌아가면 우리는 변기는 원래 그렇게 깨끗하고, 상은 손쉽게 차려지며, 아이들은 가만 놔두어도 알아서 큰다는 마법의 세계로 돌아가고 만다. 마치 인터넷 뱅킹의 세계가 무사태평하게 평안히 돌아가며, 정보보안 담당자는 할 일이 없는 놈팡이처럼 보이듯 말이다. 어린이가 잘 커서 성인이 되면 아이가 스스로 노력하여 그렇게 된 것으로 칭찬하지만,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집에서 뭐하고 있었느냐'는 비난이 가정주부에게 쏟아진다.

 

결국 가정주부가 치러야 하는 가장 큰 대가는 무가치하다는 평이다. 실제로 돈을 버는 직장인들은 최소한 무가치하다는 평을 듣지는 않는다. 가정주부를 향한 가혹한 평은 가정주부를 상당히 위축시키며 그를 자기 비하의 세계로 이끈다.

 

난 가정주부를 향한 경멸이 점점 가속화되리라고 본다. 아이가 없는 가정은 특히 더 그러할 것이다. 결혼생활이란 사랑이 있어도 어려운 것인데 이것저것 따지고 재며 결혼한 가정의 가정주부라면 앞날이 더욱 암담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직업란에 '가정주부'라고 적는 것 자체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 우리의 인식이었다. 

 

결혼이란 애초에 손해 보는 장사다. 결혼하고 매일 같이 다투는 이유는 결혼을 장사로 생각했기 때문이고, 결혼해서 이득을 볼 줄 알았는데 손해를 봐서 화가 나기 때문이다. 이제 다투기까지 했으니 괜히 결혼해서 엄청난 손해를 본 셈이다. 결혼을 장사로 생각한다면 매번 이득을 보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걸 인정하기 싫다면 결혼을 하지 말아야 했다. 이 사회에 미혼 인구가 증가하는 이유는 그런 식의 경멸이 서로에게 쌓여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왕지사 결혼을 했다면 바깥일에서 얼마의 돈을 벌어오는지를 두고, 가정일이 얼마나 손쉬운지를 두고 서로의 득실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 매사에 그런 걸 따지고 있으면 얼마나 피곤한가. 하지만 손익 계산을 관두기가 쉽지 않다. 오늘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싸움 소식을 듣게 되면 난 인간이 천성적으로 장사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건축가 아돌프 로스가 썼던 것처럼 인간을 두 범주, 즉 예술가와 상인으로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말자. 대부분의 사기꾼과 장사꾼 들은 예술가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걸인은 수익을 내지 못하기에 낙제이고, 그것 때문에 경멸당한다. 가정주부와 비교하여 좋은 점이라면 그 시선을 두고 누구와 매일 같이 다툴 일은 없다는 것이다.

 

 

  1. 재레드 다이아몬드 글, 김진준 옮김 <총, 균, 쇠> (문학사상사 2013), 291쪽 [본문으로]
  2. "역주: '디에고'의 변형으로 라틴계, 특히 스페인 사람을 뜻하는 속어." 조지 오웰 저, 신창용 옮김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삼우반 2009), 200쪽 [본문으로]
  3.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광기의 역사> (나남출판 2003), 138쪽 [본문으로]
  4. 조지 오웰 저, 신창용 옮김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삼우반 2009), 21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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