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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복음 (2)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5. 1. 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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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들여다보게 되는 것은 화자의 시점이다. 예수라고 하는 신적 존재의 마음을 과연 어떻게 표현할지 무척 궁금했기에 소설을 읽을 때 그 부분을 계속 유심히 보았는데, 주제 사라마구는 예수의 속마음을 알고 있는 듯 하면서도 모르는 듯 이야기는 기법을 썼다. 예수 그 자신이 소설을 쓴 것처럼 또는 그저 관찰자인 것처럼. 잊혀진 그리스의 신이 아니라, 현세의 신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주제 사라마구는 그런 선택을 했다. 흥미롭다.


"그 순간, 왜 그러는지 스스로 자문해 보지도 않고, 아마 아담을 기억해서 그랬겠지만, 배낭과 지팡이를 내던지고, 튜닉 가두리를 들어 올려 머리 위로 벗어버리고 아담처럼 벌거벗었다. (...) 그들이 예수에게, 왜 옷을 벗었어, 하고 묻는다면, 예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람은 벌거벗고 사막에 들어가야 해. (...) 우리는 자문한다, 그 가시들이 벗은 피부에 스치고 음모에 들어갈 텐데 벌거벗다니, 날카로운 엉겅퀴와 거친 모래가 있는데 벌거벗다니, 어지럼증이 일어나고 눈이 멀 수 있는 뜨거운 해 아래 벌거벗다니, 우리 나름의 표시를 해놓은 그 길잃은 양을 찾으려고 벌거벗다니. 사막이 열리며 예수를 받아들이고, 그가 들어오자 닫힌다. 마치 퇴로를 막는 것 같다. 죽어 텅 빈 소라 껍질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정적이 귀에서 메아리친다. 소라 껍질은 해안에 쓸려와 파도의 거대한 소리를 흡수한다. 어떤 행인이 그것을 천천히 귀에 갖다 대고 듣다가 말한다, 바다로구나. 예수의 발에서 피가 난다. 해가 구름을 밀어내고 그를 찌른다. 가시는 움켜쥐는 손톱처럼 다리를 찌른다. 엉겅퀴가 몸을 긁는다. 양아, 어디 있니, 예수가 소리친다. 언덕들이 그 말을 전한다, 어디 있니, 어디 있니." (314~315쪽)


주제 사라마구가 이 책에서 제기하는 주요 문제는 다음의 둘인것 같다: 죄의 유전(아담과 하와가 이미 벌을 받았음에도 그 죄가 어찌하여 후대까지 이어지는가)과 희생양(신은, 카인과 아벨에게 그러했듯이, 왜 동물의 죽음-희생제물-을 원했는가?). 


인신공희의 관습에서 희생제물로의 변천은 비단 기독교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고대 세계에서 나타났던 역사적 사실이며(놀라운 우연의 일치인가?),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제사 때 올리는 돼지머리). 기독교에서는 사실상 이 번제물을 나쁘게 보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 기독교는 예수가 희생제물로서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또 살아있는 사람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위한 제물이 될 수 있다는 설교도 있는 걸로 봐서는 결국 주의 소유물인 인간이 번제물로 바쳐지는 것에 대해 그리 큰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는 자신의 죽음으로 그러한 동물들의 희생제물을 금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소설이 문제삼고 있는 부분은, 그럼 예수의 희생 전까지는 신이 왜 그런 번제물을 좋아했느냐 하는 것인데, 따라서 소설 속에서 예수는 죄없는 양의 그런 희생을 보며 당혹감을 느끼곤 한다(기회가 닿는다면, 이 부분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은 어떠한지 알아보고 싶다).


그러나 그런 동물들의 희생보다 더 큰 문제를 가진 주제는 인간의 희생에 관한 문제이다. 신의 이름으로 일어날 모든 죽음, 모든 희생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신과 예수는 문답을 통해서 그런 희생이 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논쟁하곤 하는데, 후에 예수는 사람들을 희생(죽음)으로 이끌어야하는 자신의 예견된 운명 때문에 고민하게 된다.


"나는 똑같은 지팡이로 순결한 양과 악한 양, 구원 받은 양과 길 잃은 양, 태어난 양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양을 모두 희생으로 이끄는 목자에요, 누가 나를 이 죄에서 구원해 줄까요." (495쪽)


종교적 문제,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주제 사라마구의 그런 상상력은 놀라웠다. 소설 말미에서 이야기의 핵심을 드러내는 예수의 외침은 비장미가 넘친다. 그렇게 이야기를 끌어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기만 하다. 또한 사랑, 구원과 더불어 흑백논리, 이단, 무조건적인 믿음, 심판이라는 기치가 일부 종교인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신변에 위해를 가할 수도 있는 그런 해석을 시도했다는 용기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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