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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4. 12. 28.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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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이 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동녘 2012)의 마지막 장은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이다. 이 장은 바우만이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와 "반항하는 인간"을 토대로 쓴 글인데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난 몇 번이고 반복해서 해당 부분을 읽어야만 했다. 그 후 내 나름의 해석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여기에 기록한다.


첫 번째 단락
바우만은, 그동안 카뮈에 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 왔는데 그런 연구들이 찾고 있는 것은 바로 "알베르 카뮈가 자신이 살던 그 세계를 목격했을 당시에 그가 취했던 태도는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단락
위의 그 단 하나의 질문(그가 취했던 태도)에 수많은 대답이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한다. 여기에서는 "'해결책들이 실제로는 없다'라는 그 사실이 여러 많은 해석들을 제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그러한 이유 때문에 "카프카나 카뮈는 자신들의 초상화 속에 (...) 모든 불멸하는 사상들의 전형을 스케치해놓았"다고 이야기한다.

 

세 번째 단락
자신의 카뮈에 대한 해석이 다른 사람과 다를지라도 이해해 달라는 부분. 글 전체 흐름과는 큰 연관이 없다.

 

네 번째 단락
"아름다움도 있지만 분명 굴욕적인 것들도 있다. 나는 그 사명이 어떤 어려움을 안겨준다 할지라도, 결코 그처럼 굴욕적인 것들이든 아름다움이든 간에 둘 중 그 어느 하나에도 불성실하고 싶지는 않다"라는 문장이 이 단락과 글 전체의 요지라고 할 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카뮈가 한 그 말을 "어느 '한쪽 편을 들어서' 다른 어느 한쪽을 희생하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양쪽 임무 모두를 달성할 수 없는 것"이라며 옹호한다: "카뮈는 자신의 표현대로, "비참한 고통과 태양 사이의 중간쯤 어딘가에" 자기 자신을 위치시킨 것이다.

 

그 후 '비참한 고통'과 '태양' 사이에 있다는 것의 의미를 카뮈의 입을 빌어 부연 설명한다. 카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참한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태양' 아래 모든 것들이 보기 좋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인간의 역사에 관해서는 비관적이지만, 인간에 관해서는 낙관적"이라고. 여기서 '인간의 역사에 관해 비관적'이라는 말은 '역사적 반항'(카뮈의 "반항하는 인간" 중 '형이상학적 반항'과 '역사적 반항' 참조)이 실패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즉, 반항의 힘이 현실(역사) 속에서 실제 나타났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는 그런 실패를 대표한다. 반면에 '인간에 관해서는 낙관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작 자신이 바로 그러한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를 거부하는 유일한 피조물"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리하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에 "더 나아질 수 있는 하나의 기회"를 가지고 있고, 그런 절대적 자유를 가진 인간의 존재는 그 존재만으로도 자유롭지 않은 세계에서는 하나의 반항의 행위가 되는데, 그 반항이 현실에서 항상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단락
카뮈의 시지프스와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시지프스는 부조리에 억눌려 자살(순응)하는 인물로, 반면 프로메테우스는 부조리에 반항하는 인물로 나오는데, 카뮈는 이 두 인물을 병치시키면서 결과적으로 "거부가 긍정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반항한다", 그렇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카뮈는 결론 내렸던 것이다."

 

바우만은 이때 '반항'에 대해 부연 설명하는데, 이 반항이란 "인간들 각자가 자신들의 실천을 통해 반항해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실에 순응하며 그저 반복적으로, "자기파멸적으로 혼자 돌을 굴리는" 시지프스에게서는 '우리'라는 말을 떠올릴 수 없다고 바우만은 이야기한다.

 

여섯 번째 단락
시지프스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렇게 반복적으로 돌을 밀어올리는 시지프스는 비극적인가? 만일 그가 별 생각 없이, 그저 반복적으로 돌을 밀어올리기만 한다면 그는 비극적이지 않다. 그는 그의 노동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지프스가 비극적인 이유는 "자신의 그 노동이 결국에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거나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야 그는 자신의 노동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고, 그것에 탈출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괴로워하다가 결국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런 비극이 시작되어야만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바우만은 카뮈의 입을 빌려 이렇게 이야기한다: "결코 그 어떤 운명도 경멸(상황을 무시하는 태도)을 통해서는 극복될 수 없는 법이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알지 못한다면 변화는 일어날 수 없다. 오직 자신이 처한 그 상황을 알고 나서야 그 비극적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우만은 다음과 같은 카뮈의 글을 인용한다: "행복과 부조리는 지구라는 똑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이다. 그들은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다."

 

그래서, 돌을 밀어올리는 노동을 무한히 반복하는 시지프스의 작업은 겉으로 보기엔 비극적이지만 "사람들은 반드시 시지프스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만 한다." 그 시지프스는 자신이 처한 부조리를 맞이하고도 '자살'하지 않고 다시 꿋꿋히 돌을 밀어올리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반항하는 정신이며, 높은 곳을 향해 몸부림치는 투쟁이라 할 수 있다. 그런 투쟁 자체야말로 "인간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즉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바우만은 이야기한다.

 

일곱 번째 단락
글을 전체적으로 정리하는 부분이다. 첫 번째 단락에서 나온 질문(카뮈의 태도)에 대한 답을 네 번째 단락에서 하였는데("굴욕적인 것들이든 아름다움이든 간에 둘 중 그 어느 하나에도 불성실하고 싶지는 않다"), 이제, 그 답에 담긴 카뮈의 의도를 이 전에 설명한 내용들에 덧대어 더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즉, 아름다움과 굴욕적인 것의 조합은 "수용과 반항을 조합"하는 일이며, "그 비참한 것들에도 관심을 두고 돌보는 일이야말로 바로 양쪽 전선 모두에서 싸우고 있는 카뮈의 기획을 지켜내는 일이라"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반란과 혁명, 자유를 향한 노력들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에 필연적인 측면들"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존경할 만한 추구들이 폭정으로 끝나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러한 추구들에 한계들을 설정해서 항상 주시해야만 한다"는 카뮈의 말을 전한다. 반항하는 정신은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 가치는 악당 또한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여덟 번째 단락
"이런데도 정말로 카뮈는 50년 전에 이미 사망했다고 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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