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라마구의 이 책은 성서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아야 음미하며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제 사라마구는 마태복음에 묘사된 동방박사의 방문을 소설 속에 등장시키지 않는 대신, 시기상으로 동방박사보다 더 먼저 아기예수를 방문했던 목자들을 동방박사와 같은 형태로 등장시키고 있다. 즉 세 명의 동방박사 대신 세 명의 목자가 나오며, 그들은 신약성경의 동방박사처럼 마리아에게 (황금, 유황, 몰약 대신) 양젖, 치즈, 빵을 선물한다. 헤롯왕이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살해이는 이유는 동방박사의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동방박사는 등장하지 않으므로) 순전히 미가의 예언 때문인 것으로 나오며, 요셉과 마리아가 도망치게 되는 계기는 천사의 계시가 아니라 요셉이 우연히 군인들로부터 들은 베들레헴 유아 살해 명령 때문이다.
예수복음에서 요셉은 20대 초반의 엣된 청년인 것으로 묘사되며 마리아는 10대로 등장한다(요셉과 마리아의 정확한 나이는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성경에서 요셉은 예수 외에 다른 자식들을 둔 것으로 나오는데, 이 아이들은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기 이전의 전처에게서 낳은 아이들이라고 말한다(그래서 화가들은 보통 요셉을 아주 나이 든 모습으로 묘사하곤 한다). 그러나 예수복음에서는 그 아이들 또한 마리아가 낳은 것으로 설정했다(이것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이후에도 동정을 지켰다고는 생각치 않는 개신교와 입장이 비슷하다). 또한 요셉을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묘사하는데(물론 성경에서도 그렇게 성스럽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아내(마리아)를 의심하고, 아이를 구하러 가면서도 받지 못할 임금을 생각하고, 가부장적인 모습으로 아내에게 호통치는 장면도 묘사한다("요셉은 자신이 그런 예절을 빠뜨렸다는 것을 지적 받자 부루퉁해져서 아내에게 짜증을 냈다. 보통 그렇게 하면 양심을 달래고 가책을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106쪽). 이 책에서 요셉은 자신도 모르게 지어버린 죄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으로 그려진다(책에서 정확히 설명하진 않지만, 그의 십자가형은 아마도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묘사는 요셉의 죽음에 대해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은 성경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데, 작가가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놀라웠다. 요셉을 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가톨릭에서 보자면 상당히 모욕적인 묘사인 셈이다. 그런 전개를 펼치고 있으므로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 그녀의 수태를 알렸을 때, 마리아는 누가복음 1:34에서처럼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말하는 대신 "나한테 아이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아세요" (33쪽)라고 되묻는다.
이런 장면들을 위해 주제 사라마구는 성경을 (또한 유대인들의 제사를) 매우 치밀하게 분석한 것으로 보이는데, 예를 들어 마리아가 예수를 출산한 뒤 성전에 가서 받는 정화의식을 묘사한 것이 그렇다. 마리아의 정화를 위해 성전에 들어가 비둘기 두 마리를 희생시키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것은 성경의 레위기 제12장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주제 사라마구는 틈틈이 성경의 내용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정화의식 중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나("성자가 아니라면 이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이 스스로 주장하듯이 모든 인간과 짐승의 아버지라면 어떻게 이런 무시무시한 살육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112~113쪽), 성경의 역대상 21장에서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벌로 여호와 전염병을 내려 7만 명을 죽인 것("하느님의 뜻이라면, 전염병이 퍼지게 하소서. 그러자 하나님은 전염병을 보냈고, 칠만 명이 죽었다. (...) 우리는 또 다윗의 실수에는 지체없이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 하나님이 지금은 로마가 하나님이 선택한 자녀들에게 주는 수모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이나 권위를 노골저으로 무시하는데도 하나님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161~162쪽), 그리고 헤롯에 의해 베들레헴의 아이들이 죽을 때 여호와가 요셉의 아들만 구했을 뿐 다른 아이들은 구하지 않았다는 점("언젠가는 왜 하나님이 이삭은 구했으면서 베들레헴의 그 가엾은 아이들은 보호해 주지 않았느냐고 묻게 될 것이다. 그 아이들도 아브라함의 아들처럼 죄가 없었지만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는 아무런 자비도 얻지 못했다." 168쪽) 등이 그렇다.
이렇게만 보아도 예수복음은 성경과는 아주 다르게 쓰였으며, 성경에 나타난 신의 불가해한 행동들을 꼬집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신의 무자비한 모습이나 신을 받든다는 이들의 잔인한 모습을 회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이런 내용들이 소설 앞단에 깔린 것은 소설 말미에 여호와, 즉 신의 잘못을 꼬집기 위함이며, 그렇기에 예수 또한 자신의 아버지인 신의 잘못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기존에 기독교가 직면했던 많은 비판처럼 완전히 원색적이지는 않으나, 예수의 죽음이 상징하는 바를 색다르게 해석해나가는 이 소설의 여정은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주장들 이상으로 충격적임에 틀림없다.
내가 주의깊게 본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이 책이 인간의 내적 영웅(외적 영웅이 아닌)이 가질만한 고뇌를 어떻게 풀어갔는가 하는 것이었다. 인간 외면의, 물리적인 힘을 가진 영웅은 그동안 많은 방식을 통해 묘사되어왔다. 만화나 영화 속의 수많은 히어로물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만일 누군가 인간 내면에 대해 썼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불완전하여 번민하는 사람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숭고하고 완벽한 정신의 결정체인 신의 아들이라면 그는 어떤 모습으로 묘사되어야 할까? 주제 사라마구는 글 속에서 예수에게 어떤 생명력을 부여했을까?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를 떠나 가졌던 내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주의 깊게 본 또 한 가지는 (성경과 달리 인간 예수를 어떻게 그렸는가 또는 어떻게 기독교를 논박하였는가보다는) 주제 사라마구 그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글로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는 어쩌면 우리와 같은 인간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성경이 신이 아니라 순전히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은 종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본 것일지도 모른다. 그동한 가해졌던 기독교 비판은 사실 많이 들어본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그 평범하고도 광범위한 의구심을 주제 사라마구가 어떤 식으로 표현했을지가 난 궁금했다. 묘사를 하되 추상적 묘사를 배제했다는 점 이에외, 이 책을 읽으며 특히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썼다.' 여러 가지 방식 중, 그는 자신이 가장 쓰기 편한 방식대로 그렇게 썼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책에서 주인공들을 바라보며 설명하는 화자의 위치가 그런 느낌이 들도록 만들었다. 화자는 요셉과 마리아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는 듯 묘사하면서, 그 면면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시키고 있었다. 그는 때론 현대인인 것 같으면서도 때론 그 당시의 인물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때론 확신하면서도 때론 추측했다. 아마 그 방식이 단지 이 책만이라 아니라 주제 사라마구 그 자신에게 가장 맞는 방식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다른 책 또한 이런 편안함 속에서 쓰여졌는지 궁금해졌고, 난 다음엔 그의 어떤 글을 읽을지에 대한 기분 좋은 고민에 빠졌다.
책의 큰 줄거리와는 관계가 없지만 다음 문장이 가슴에 와닿았다. "그들은 서로, 또는 심지어 하늘에게도 물었을 것이다, 이 새로운 새벽이 무엇을 가져올까. 언젠가는 우리도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날이 올 때까지는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자문해 보자. 이 새로운 새벽이 무엇을 가져올가까." (187쪽) 새벽 또는 아침에 일어나, 오늘 이 새로운 새벽이 나에게 무엇을 가져올 것인지가를 곰곰히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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