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보나라 프리마베라. 2018.11.22.
1.
저녁 식사로 카르보나라를 만들었다. 따로 언급할 만한 이슈가 있는 요리는 아니지만 파스타 면이 조금 특별했다. 면의 이름은 링귀네 프리마베라. 이탈리아 바리 시를 연고로 하는 마렐라에서 만든 파스타 면으로, 일반적인 파스타 면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조되었다. 구매 전에 파스타 면이 이렇게 비싼 이유를 판매원에게 묻기도 했었는데, 그때 판매원은 다른 파스타 면과는 다르게 식감이 좋고 쫄깃하다고 답을 했다.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파스타 면의 놀라운 가격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일반적인 파스타 면보다 2배도, 3배도 아닌 15배나 비싼 이유가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물질만능주의적 허영을 노린 저급한 심리전을 펼치고 있거나 파산을 하려고 작정을 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알고 보니 이 파스타 면의 놀라운 가격에는 판매원이 알려주지 않은 다른 이유들이 있었다. 이를 테면 천연 재료의 사용이다. 이 파스타 면은 다양한 색을 띠고 있었는데, 강황, 파프리카, 시금치, 비트 같은 천연 재료를 이용하여 색을 입힌 것이었다. 그래서 파스타 면을 삶았더니 물에 색이 배어 나왔다. 게다가 일체의 인공 첨가물이나 보존제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유기농에 수제품이라는, 요즘 식세계에서 한참 뜨고 있는 요소만을 넣어 만든 파스타 면이라는 게 놀라운 가격의 근거였다.
냉철한 분석가들은 일체의 첨가물이나 보존제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마렐라 파스타만의 장점이 될 수는 없다고 지적할 것이다. 우선 다른 평범한 파스타 면들이 어떤 첨가물과 보존제를 사용하고 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들 역시 아무런 첨가제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면 마렐라 파스타만을 높이 평가할 이유가 없다. 또한 보존제가 첨가물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그 양이 신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다면 크게 문제 삼을 이유 역시 없다. 요즘처럼 '천연'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더불어 그에 대한 부작용이 알려지고 있는 시점에선 더욱 그렇다. 유기농이나 수제라는 설명 역시 비슷하다. 면을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뽑았다고 해서 더 맛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마렐라 파스타는 수타면이 아니라 기계를 이용하여 뽑은 면이기에, 일부 유통업체에서 광고하고 있는 '수제'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도 어려웠다.
그렇다면 난 대체 무슨 이유로 마렐라에서 만든 링귀네 프리마베라를 구매했단 말인가?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프 융의 말을 빌리자면, 뿌리를 지옥까지 뻗어 본 나무만이 천국까지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는 프리미엄을 지향하는 파스타 면과 평범한 파스타 면이 얼마나 다른지 알고 싶었다. 그 면으로 얼마나 다른 수준의 맛을 낼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알아냈는가 하면, 답은 아직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식감에선 분명 차이가 있었는데, 그게 마렐라에서 주장하는 대로 면을 전통 방식으로 생산하고 저온에서 2~3일 건조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프리마베라의 형태가 납작하여 표면적이 넓은, 즉 '링귀네'였기 때문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 천연 재료에 유기농을 사용했다는 것은 맛과는 별 관련이 없고 건강과 관련이 있는데, 당연하게도 그를 바로 알아낼 수는 없었다. 내 생각으로 가장 커다란 차이는 심리적인 면에 있었다. 몸에 이로울 거라는, 최소한 해롭지는 않을 거라는 안정감, 아내가 임산부이므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위로, 면의 다양한 색감에서 오는 미적 감흥,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보았다는 경험적 만족, 그리고 이 정도의 사치는 부릴 형편이 된다는 약간의 허영.
2.
국내 백화점에서 미국의 수입 가격이나 국내 소규모 온라인 유통업체보다도 훨씬 높은 가격을 받으며 이 파스타 면을 판매하고 있다는 건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1급지 상업지역에 주차한 뒤 점원의 친절한 안내와 설명을 곁들여 가며 백화점에서 우아하게 쇼핑한 비용을 파스타 면의 구입 가격에 포함시키는 것이 합당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이들은 면 하나를 구매하는 데 소모한 시간을 훨씬 큰 손해로 간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3.
이 파스타 면의 이름은 '프리마베라'였다. 왜 하필 프리마베라일까? 프리마베라는 우리나라 말로 '봄'을 뜻하는데, 이것은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보티첼리의 작품명이기도 하다. 작명가가 보티첼리를 떠올리며 이름을 지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 면을 채색할 때 사용한 비트, 시금치, 파프리카 같은 식물들이 봄과 연관이 있는 걸까? 큰 관계는 없어 보인다. 하긴, 이 면의 이름을 여름을 뜻하는 '에스타테'로 지으면 또 어떻단 말인가. 차종과 그 이름에 거의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내 이름과 내 천성에 거의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처럼 때로 이름은 그저 호명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프리마베라 면은 '봄'과 높은 관련성이 없어 보이지만 '파스타 프리마베라'와는 관계가 있어 보인다. 파스타 프리마베라는 여러 채소를 곁들여 만든 파스타를 가리키는데, 프리마베라 면은 여러 채소를 사용하여 색을 낸 것이므로 다양한 채소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아마도 봄에 수확한 여러 채소들을 곁들여 만든 파스타였기에 파스타 프리마베라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 어쨌거나 '봄의 파스타'라니 꽤 신선하고 청량하다.
4.
파스타 면의 다양한 색을 살리기 위해 카르보나라를 만들었다. 넙적한 링귀네 면이므로 이 면과 잘 어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페스토를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테지만 그래도 그나마 자신있는 건 카르보나라였다. 우리나라에서 카르보나라 하면 우유나 크림을 듬뿍 담은 걸 떠올리는데, 난 이탈리아의 오래된 '진짜' 카르보나라 레시피를 따라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요리사인 카를루시오는 카르보나라를 만들 때 절대 크림을 넣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만큼 카르보나라를 만들 때 크림이나 우유를 넣는 경향이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원조의 입장에선 레시피를 마음대로 바꿔버리는 게 불쾌할 수는 있겠다.
나름 따라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만든 걸 '진짜' 카르보나라라고 할 수는 없다. 비슷하게 흉내만 냈을 뿐. 난 아이에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어설프게 만든 카르보나라를 여기서 미리 먹어봐야 훗날 이탈리아에서 '진짜' 카르보나라를 맛보았을 때 그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지금의 이 미숙한 카르보나라는 바로 그때를 위한 것이라고. 아이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땠는지, 파스타 면을 입에 물고는 또랑또랑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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