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위엄을 주기 위해서는 질서가 필요하다" ㅡ 안도 다다오
1.
대개의 건축가들은 건축물 내외부의 기하학적 구성이 인간의 정신적인 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다. 안도 다다오도 예외는 아니다. 그 역시 건축이 인간 생활에 미치는 효과를 고민하고 그 결과를 건축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안도 다다오를 비롯한 유명 건축가들의 건물 주변을 걸으며 그들이 의도한 효과를 누릴 수 있는가 하는 건 다른 문제이다. 의도는 건축뿐 아니라 인간사 전체를 놓고 보아도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요소 중 하나이다. 우리가 사물에서 일차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건 작가나 건축가의 의도가 아니라 단순한 겉모습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작가의 의도는 각자가 보고 느낀 심상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설명으로 전달된다. 전달은 때론 일방적이지만 예술가에게서 그들의 영감과 특유의 힘을 부여받고자 하는 이들은 그 메시지를 거부하지 않는다. 1
<햄릿>과 같은 위대한 작품을 접하며 느끼는 감정은 TV의 리얼리티 쇼를 보며 느끼는 감정과 확연히 다르다. 리얼리티 쇼가 전달하는 즐거움이 <햄릿>보다 강렬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대개는 <햄릿>의 가치가 더 위대하다고 여긴다. 우리는 리얼리티 쇼를 볼 때보다 <햄릿>을 읽을 때 우리 정신의 충만함을 자각한다. <햄릿>은 우리 정신을 고양시키고, 그런 방식으로 인간으로의 존엄성을 일깨운다. 비록 그 정신의 고양이 일방적인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도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작가의 의도가 자신의 짐작과 일치하면 스스로 큰 진전을 이뤄낸 것처럼 기뻐한다. 훌륭한 건축물을 바라보며 그 주변을 돌아보는 일은 <햄릿>이나 램브란트의 그림을 볼 때와 같은 효과를 일으킬 수 있으니, 건축가의 의도를 알아내는 일은 그 효과에 불씨를 붙이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강원도 원주시의 산자락에 위치한 "뮤지엄 산(뮤지엄 SAN)"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미술관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그가 형태와 소재 속에 숨겨둔 수수께끼를 제대로 풀어낼 수 있을까? 이런 관점은 정답 맞추기식의 획일적인 관람으로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건축가는 관람객에게 정답이 단 하나뿐인 수학 문제를 내밀지 않는다. 내가 알고자 했던 것 역시 건축가가 바라보았을 커다란 방향이었다.
2.
안도 다다오는 가까운 길도 멀리 돌아가도록 설계한다. 멀리 회유하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이를 테면 자연과의 관계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그 과정에서 관람객들이 풍경을 연속적으로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런 의도를 제대로 따라가기는 쉽지 않다.
뮤지엄 산의 어떤 방에는 짧은 계단을 설치할 수 있음에도 굳이 기다란 벽을 따라 내려가도록 만든 긴 경사로가 있었다. 그 때문에 적지 않은 공간이 낭비되고 있었다. 난 그 긴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는 동안 앞을 보지 않고ㅡ앞에는 별 게 없었다ㅡ고개를 돌려 옆에 놓여 있는 내부의 설치물들과 외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경사로는 어떤 의도로 설계된 것일까? 실용적으로 보자면 휠체어에 대한 배려이다. 하지만 난 안도 다다오가 실용적 설계와는 거리가 먼 건축가라는 걸 안다.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인공적으로 조성된 얕은 못이 보였고 그 뒤로는 뮤지엄 산의 본관 건물이 일부 보였다. 나는 풍경을 바라보며 주변을 잠시 서성였다.
안도 다다오는 건축물이라는 결과뿐만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 역시 중요하게 여긴다. 만들어지는 과정은 건축물이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과정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구체화화는 과정을 실제 공사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겼다. 내가 서성이던 그 방에는 아이디어부터 실제 공사에 이르는 뮤지엄 산의 건축 과정들이 사진과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그곳은 사실상 안도 다다오를 위한 방이었다. 그간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는 건축물을 여러 곳 들러보았는데 건축가를 위해 방 하나를 내준 곳은 뮤지엄 산이 처음이었다.
3.
안도 다다오는 대리석처럼 매끈한 노출 콘크리트의 연출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자신만의 특별한 노하우로 콘크리트의 거친 중량감을 가볍게 이미지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덕분에 빛은 콘크리트에서 거칠게 분산되는 게 아니라 마치 거울면에서처럼 일정하게 반사된다. 한국에도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지은 건물들이 많은데 안도 다다오의 콘크리트와는 그런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그런데 뮤지엄 산은 노출 콘크리트 효과가 안도 다다오의 다른 건축물처럼 두드러지지 않았다. 뮤지엄 산의 본관은 노출 콘크리트가 아닌 파주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건물 내부는 노출 콘크리트로 되어 있었지만 외부에서는 콘크리트의 형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본관 외부를 파주석으로 두르고 그 주변을 얕게 조성한 못으로 에워쌌는데, 앞에서 보니 그 모습이 마치 중세 시대의 일본 성채처럼 느껴졌다. 우리나라엔 해자로 두른 성채가 남아 있지 않으니 일본의 것이 떠오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본관 건물의 벽면을 일본의 성벽처럼 약간 기울어지게 설계하여 그 느낌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일본의 성곽은 경사면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래전, 안도 다다오는 자신의 벽을 공격적인 벽과 방어적인 벽으로 구분한 일이 있다. 뮤지엄 산의 벽은 성벽을 닮았고 그런 점에서 보면 벽의 방어적인 면을 부각시켰다고 볼 수 있다. 산에 자리하고 있는 뮤지엄 산은 방어에 어울리다. 산 정상부에 성을 쌓아 올리곤 했던 전례를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안도 다다오는 노출 콘크리트를 배제시키는 방식을 통해 공격과 방어라는 노출 콘크리트의 양립적 성격에서 공격적인 부분을 지워냈다. 공격적인 벽은 도시에 어울린다는 판단 때문이었을까? 2
일본의 나오시마 섬에는 흔히 나오시마 현대 미술관이라고 부르는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이 있는데, 이 미술관 역시 안도 다다오의 작품으로, 건물 일부를 매끈한 노출 콘크리트 대신 자연석으로 꾸몄다. 주변에 펼쳐져 있는 바다와 푸른 언덕을 고려한 디자인이었을 것이다. 뮤지엄 산은 일부가 아니라 본관 건물 전체를 자연석으로 꾸몄다는 데 차이가 있다.
이쯤되면 제주도에 있는 본태 박물관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안도 다다오는 본태 박물관의 외벽 일부를 조선 궁궐의 전통적인 양식을 본따 만들었다. 제주도의 섭지코지에 있는 유민 미술관(옛 이름은 지니어스 로사이)도 벽 일부를 노출 콘크리트 대신 제주도의 검은 현무암을 이용해 세웠다. 이처럼 안도 다다오는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지도록 노출 콘크리트를 활용하였는데, 유독 '글라스하우스'만은 달랐다. 역시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제주도의 글라스하우스는 건축적으로 많은 호평을 받은 바 있는 유민 미술관의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데, 안도 다다오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주변 풍광을 해친다는 지적을 많이 받고 있다. 건축가들도 안도 다다오스의 실패작 중 하나로 글라스하우스를 뽑을 때가 많다. 글라스하우스는 외벽 전체가 노출 콘크리트로 되어 있어 벽의 공격적인 성질이 두드러지고, 그리하여 제주도의 섭지코지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4.
안도 다다오는 "건축은 아무래도 객관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그에 반해 일반인들은 건축이란 공학이고, 따라서 객관적으로 설명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정량화도 가능해야 하며, 때로는 그게 전부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건축가의 시각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건축을 오로지 숫자로 간주하는 시각은 난해하고 비실용적인 건축가를 향한 비난으로 연결된다. 위대한 건축가들도 때론 실패를 하며 평범한 사람들도 때론 건축의 힘을 감지한다. 건축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아마도 그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을 것이다. 3
엇갈리는 공간이 있다. 비율이 어긋난 삼각의 형태로 갈라지는 공간. 이 엇갈림은 기하학의 엄격한 규율과 인간의 생활의 부조화를 드러낸다. 삶은 어디에나 부조리를 틀고 있다. 뮤지엄 산. 원주시 지정면, 2018. 9. 5.
안도 다다오를 위한 공간. 뮤지엄 산. 원주시 지정면, 2018. 9. 5.
안도 다다오가 그린 뮤지엄 산의 초기 도안. 뮤지엄 산. 원주시 지정면, 2018. 9. 5.
안도 다다오는 물을 많이 활용한다. 거대한 평지에 얕은 못을 만들고, 계단 위를 흐르게 하며, 때로는 벽에서 폭포수처럼 떨어지도록 한다. 뮤지엄 산. 원주시 지정면, 2018. 9. 5.
물, 빛, 중정, 파주석의 외벽과 내부의 노출 콘크리트. 안도 다다오의 건축 스타일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뮤지엄 산. 원주시 지정면, 2018. 9. 5.
철제 기둥이 세워져 있고 불규칙한 형상의 돌들이 바닥을 채우고 있는 삼각형의 중정. 문득 돌산의 정상과 그곳에 놓인 표지석이 떠올랐다. 중정의 윗 공간으로 직사광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 아래를 반사광이 채운다. '윤곽 속의 하늘'을 지나가는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의 대비. 자연은 풍요롭지만 텅 비어 있기도 하며 때로는ㅡ딱딱하며 차갑고 붙잡을 수 없을 만큼 먼ㅡ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뮤지엄 산, 원주시 지정면, 2018.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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