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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식물학>, 식물에게서 배우는 의아스러운 교훈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8. 10. 7.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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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성스럽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하려는 좋은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때로 문제를 일으킨다. 모든 일을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려다 보면 진실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완주 교수는 자신이 쓴 <베란다 식물학>에서 식물의 잎 색깔이 바래는 현상을 어머니의 자녀 사랑으로 비유했다. 오래된 잎은 자신의 양분을 새로 난 잎에게 내주고 그에 따라 잎 색깔이 연해지는데, 이 현상을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해서 음식을 양보하는 모습으로 비유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식물의 매 현상에서 인생의 교훈을 찾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식물이 보이는 어떤 행태마다 인간이 배워야할 가치를 특히 윤리적인 부분에서 이끌어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고 하였으니, 식물에게서도 배울 점을 찾는 이완주 교수의 노력은 훌륭하고 배울 점도 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어떤 현상에서 '부모의 희생'을 떠올리는 경우는 흔한 편이다. 그와 반대로 어린 잎이 늙은 잎에게서 영양분을 '강제로' 탈취하고 있다고 비유하는 경우를 난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우리에게 식물이란 존재를 태어나면서부터 선한 생명체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게 어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것에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식물 역시 다른 생명체처럼 종족 보전을 위한 유전자 기계(리처드 도킨스의 표현에 따르면)일 뿐으로, 실제로 식물은 자신의 번식을 위해 다른 생명체를 공격하는 것을 불사하지 않지만 우리는 식물에서 오로지 아름다운 모습만을 보려고, 또 그것만을 생각하려고 애쓴다. 


가령 이완주 교수는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사람이 늙은 잎을 일부러 따버리는 일을 두고는, 경제활동을 못하는 노인들이 지나치게 자식들에게 기대어 낭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에 비유했다. 내가 처음에 서술한 그의 생각대로라면, 늙은 잎이 어린 잎에게 양분을 양보해 주듯 늙은 잎은 '스스로' 떨어져 버려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인간이 강제로 커다란 잎을 따버려 양분이 열매로 가도록 만들어야 했다. 



2.

활엽수가 늦가을에 잎을 모두 떨궈버리는 현상을 보며 교훈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은 '인간도 저 식물들처럼 겨울을 대비해서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에너지를 모아두어야 한다' 하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회의주의자는 '자신의 보존을 위해 그간 함께 했던 잎들을 모두 내쳐버리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허용할 만한 일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이다. 늙은 잎과 어린 잎에서 부모와 자식을 떠올리는 형편에, 나무와 그 잎의 관계 역시 그리 바라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런 입장에서 보면 식물은 자식에게, 동료에게, 다시 말해 자신의 잎들에게 아주 매정하다. 하지만 누구도 식물을 그런 관점에서 보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보다 못하고 나약한 동시에 우리에게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는 존재를 태초부터 선한 것으로 바라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식물이 딱 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편향, 특히 확증 편향에선 이질감이 느껴진다. 이런 식의 관점은 식물을 바라보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인간에게도 그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아름다운 여인이 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꽃대를 꺾는 행위만 해도, 그 사람의 연인이 볼 땐 아름다움에 취한 미적이고 숭고한 행위일테지만,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볼 땐 꺾거나 말거나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며 그 여자를 싫어하는 사람이 볼 땐 괜한 생명을 강제로 꺾어 고통을 주는 이기적인 행위가 되고 만다. 여러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이중적 태도를 취할 때도 많다. 자신의 여자 친구가 꽃을 꺾을 땐 아름다움은 서로 통한다며 칭찬하지만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 꽃을 꺾는 모습을 보면 생명을 경시한다며 비난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이러한 이중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이런 이중성을 지적받는 것조차 못 견뎌 한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식물의 어떤 행위에서 인간이 배울만한 숭고한 교훈을 떠올렸다 해도 그것은 "인간의 귀가 두 개인 이유는 안경을 걸기 위해서이며, 이런 방식으로 눈과 귀는 상생을 하고 있다" 같은 주장처럼 피상적인 느낌을 주고 만다. 인간은 그저 자신이 흘린 눈물에 감동할 뿐이라는 오래된 의심이 항상 참일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흘린 눈물에 스스로 감동할 때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선 항상 좋은 면만 보려 한다는 명제를 항상 피해가기는 어렵다. 


지은이는 <베란다 식물학>에서 식물을 인간 못지 않은 생명체로, 때로는 인간보다도 더 위대한 존재로 묘사하려 노력했다. 그 마음 씀씀이에는 놀랍고도 감동적인 면이 있다. 식물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것도 결국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결국 지은이는 돌고 돌아 인간의 경이를 드러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경이는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름다우나, 함부로 다루다 깨지면 위협으로 되돌아오는 유리와도 같다. 



3.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하나 더 있다. 책을 보면 뿌리혹박테리아를 이용하여 질소고정을 할 수 있는 식물이 "오직 콩과식물뿐"(74쪽)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여기엔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뿌리혹박테리아를 넓게 보면 프랜키아(frankia)속 미생물도 포함시킬 수 있는데, 이 프랜키아가 오리나무, 보리수나무, 독나무 등에 뿌리혹을 생성시켜 질소고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나무들은 뿌리혹이 있지만 콩과식물이 아니다. 식물의 성장을 도우며 질소고정을 하는 미생물들은 지금도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중이므로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차차 바뀌게 될 것이다.



4.

이러한 사소한 단점들이 있었지만 <베란다 식물학>은 독자들이 식물을 인문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이끌어 갔다. 지은이는 '일주일에 몇 번 물주기'와 같은 틀에 박힌 방식이 아니라 식물이 생장하는 기본 원리를 말하고 그 지식을 기반으로 식물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내려다보기가 아닌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기, 식물이 자신의 몸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식물을 길거리의 흔한 사물이 아니라 소중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보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자신의 임무를 다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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