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통영 충렬사(1), 성웅과의 접점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8. 8. 16. 19:34

본문

서둘러 서울로 길을 재촉해야 했다. 하지만 멀리 통영까지 내려왔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순신의 사당인 통영 충렬사를 그냥 지나치고 싶지는 않았다. 공기마저 뜨겁게 느껴지는 오후 12시경이었지만 이순신 장군과 내가 무언가 상통한다는, 그러길 원하는 바람 하나를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통영한산대첩축제 기간이어서 관람료는 무료였다.


충렬사 정문을 지나니 곧바로 동백나무가 시야에 들어왔다. 길 양쪽에 서 있던 두 그루의 동백나무 옆에는 "본래 네 그루였으나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아있다"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이는 정확한 설명이라곤 할 수 없다. 1970년 초만 해도 통영 충렬사에는 일곱 그루의 동백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옛 신문을 찾아보면 1960년대엔 모두 열 그루의 동백나무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수령이 최소 300년은 되었던 이 나무들은 해방 이후 몇 십 년 사이에 한 그루씩 죽기 시작하더니 안내판을 부착할 때 쯤에는 두 그루만이 남게 되었다. 오십 년 사이에 동백나무가 하나둘 죽어버린 사실을 안내판에 자세히 기록하고 싶지는 않았나 보다. 말을 지어내어 이목을 끌기 좋아하는 사람은 남은 두 그루의 동백마저 죽으면 나라가 망하게 될 거라고 떠들지도 모른다. 남은 동백나무는 이제 400살이 다 되어 간다.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정당 바로 앞엔 내삼문이 있었다. 솟을삼문 형태를 하고 있는 이 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활추와 초석이었다. 활주 아래쪽은 팔각 형태의 돌기둥이 지지하고 있었는데 조선 시대에 팔각은 아무나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소재였기에 눈길을 끌었다. 그만큼 선조들이 이곳을 신성하게 다루었다는 뜻이다. 이 팔각 기둥은 충렬사 정당의 용마루를 장식하고 있는 팔괘와 의미상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했다. 


팔각 기둥 아래엔 해태 모양의 초석이 버티고 있었다. 들쑥날쑥한 이빨 모양이 고졸하여 자꾸 쳐다보게 되었다. 맞은편에도 한쌍의 해태가 있었는데 제대로 된 형상을 알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고 그 중 하나는 모루라고 해도 믿을 만큼 손상되어 있었다. 어쩌면 도난당하여 하나만 남은 불국사 다보탑의 돌사자상처럼 내삼문의 해태상도 도난당하여 임시방편으로 괴석을 하나 끼워넣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여도 무사안일한 처사로 보이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망가진 채로 유지하는 것도 역사는 역사이나 연유를 알 수 없는 역사이다.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정당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와 두 그루의 금목서 그리고 후원에 위치한 대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내한성이 약해 남부지방에서 주로 자라는 금목서는 가을이 되면 꽃이 펴 진한 향기를 전한다. 옆에 있는 은행잎은 가을이 되면 노랗게 물드니 충렬사의 가을 풍경은 제법 풍요로울 것이다. 이곳의 은행나무는 모두 수나무라 하니 열매가 열리지 않아 금목서의 향과 뒤섞이지는 않을 듯하다.


위패를 모시고 있는 정당의 문은 가운데에 위치한 정칸만을 열어 두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열어둔 탓인지 문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나무로 만든 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문틀과 문짝이 벌어지고 경첩도 헐거워진다. 최근에 보수 공사를 한 것으로 아는데 이걸 그냥 놔둔 걸 보면 문이 제대로 닫히긴 하나 보다. 공사 중 교체를 한 것으로 보이는 서까래와 덧서까래는 아직 단청 칠이 되어 있지 않았다. 기왕이면 문이 바른 자세를 하도록 경첩을 조절하고 칠도 제대로 하는 게 좋을 테다. 방문하는 시민들은 이런 것 하나에 이순신 장군이 제대로 된 접대를 받고 있지 않다며 한탄할 수 있으니.


정당의 문창살은 기교 없이 담백했고 철로 된 지지대는 단단해 보였다. 대체적으로 평이하여 용마루의 팔괘 정도가 특이해 보였다. 정당 주변의 바닥 전체에 박석을 깔아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전통 건축은 이곳을 보통 흙으로 덮어 두는 편이다. 우리 민족이 이순신 장군을 성웅으로 모시는 모습을 이 판석과 입구의 홍살문 정도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외삼문 쪽에서 보이는 서피랑과 서포루가 멀리서 사당의 풍경을 채우고 있었다.


사당 왼쪽에는 작은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명나라 황제 신종이 충무공에게 보낸 여덟 종류의 하사품인 '팔사품'(보물 제440호)을 볼 수 있었다. 가치로 보자면 팔사품 중에서도 도독인이 가장 뛰어나 보였으나 나의 눈은 절로 칼을 향했다. 아쉽게도 이순신 장군이 사용했다는 쌍룡검은 복제본도 놓여 있지 않았다. 팔사품 중에서 칼에 해당하는 참도와 귀도 두 쌍이 놓여 있어 한동안 그들을 들여다 보았다. 난 여기서 어떤 상통의 느낌을 받으려 했던 것일까?


정당. 통영 충렬사, 2018. 8.14.


정당 앞 판석의 구멍. 천막 등의 기둥을 꽂을 때 사용한다. 통영 충렬사, 2018. 8.14.


내삼문. 팔각 형태의 활주와 해태상이 보인다. 판석은 정갈하나 시멘트로 보수한 계단 쪽의 흔적은 과히 좋아보이지 않는다. 통영 충렬사, 2018. 8.14.


내삼문 안쪽의 해태상.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통영 충렬사, 2018. 8.14.


외삼문쪽에서 바라본 서피랑.통영 충렬사, 2018. 8.14.


참도 한 쌍. 충무공 사후에 도착하였지만 엄연히 충무공의 검이다. 보물 제 440호. 복제품. 통영 충렬사, 2018. 8.14.

도독인. 보물 제 440호. 복제품. 통영 충렬사, 2018. 8.14.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