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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짐머 <기생충 제국>, 혹은 괴짜들의 제국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8. 8. 3. 17:25

본문

1.

기생충들이 인체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기이하기 그지없다. 적혈구에 기생하는 말라리아에서 그런 예를 볼 수 있다. 인체의 비장은 상태가 좋지 않은 적혈구를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하므로 말라리아의 침입으로 상태가 나빠진 적혈구는 비장을 통과하다가 말라리아와 함께 파괴될 수 있다. 그래서 말라리아는 샤프롱 단백질을 분비하여 적혈구가 단단한 모양을 회복하도록 돕는다. 결국 비장은 말라리아의 공격을 받고 있는 적혈구가 건강한 것으로 오인하고는 그냥 통과시켜 버린다. 조금 더 있으면 말라리아는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적혈구가 아예 비장을 거치지 않도록 혈관 벽에 들러붙기 시작한다. 그때 말라리아는 혈관 벽에 매달리기 위해 특수한 형태의 걸쇠를 사용하는데, 학자들은 면역세포들이 말라리아의 이 걸쇠를 인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말라리아의 걸쇠를 항원으로 하는 백신을 만들어보고자 했다. 하지만 이 방법 역시 실패를 하고 말았는데, 말라리아는ㅡ무척 영리하게도ㅡ예비로 쓸 수 있는 걸쇠를 수백 종류나 더 가지고 있었다. 항원을 하나 만들어 집어 넣어 봤자 말라리아는 걸쇠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간단한 방법을 통해 면역세포의 공격을 회피해 버렸다.


신기함에 있어선 구충도 예외는 아니다. 구충은 십이지장의 벽에 주둥을 박아 넣은 뒤 살점을 뜯어먹는데 이때 십이지장에서 피가 흘러나오게 된다. 그러면 출혈을 멈추기 위해 혈소판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이 혈소판이 만든 단단한 혈전으로 혈액이 응고되면서 구충의 주둥이 속 혈관이 막히게 된다. 일이 그렇게 진행되도록 놔두면 구충은 굶주려 죽을 수밖에 없다. 구충은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어떤 물질을 배출하는데, 이 물질은 응고 인자들을 중화시켜 혈소판이 응집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구충은 적당히 배를 채우고 난 뒤 유유히 다른 곳으로 떠난다.


선모충이 인간의 근육에 집을 짓고 사는 과정도 놀랍다. 야생 멧돼지 등을 날로 먹을 때 감염될 수 있는 선모충은 인간의 근육에 집을 짓기 위해 인체 내부를 돌아다니는데 이때 우리는 선모충의 움직임으로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선모충이 일단 집을 한 번 짓고나면 고통이 사라지면서 인간과 평화롭게 공존하게 된다. 물론 인간이 일방적으로 에너지를 빼앗기는 입장이니 말 그대로의 평화로운 공존일 수는 없다. 인체의 면역세포에 기생하는 기생충을 알아볼 때 쯤이면 이 세계가 그야말로 기상천외하다는 걸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기이함을 넘어서는 공포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세포 속 미토콘드리아와 식물의 엽록소조차 기생충으로 정의되기 시작하는 어느 구간부터는 이 세계가 우리가 지금껏 느끼던 상식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아직까지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커다란 신화의 불빛을 하나 꺼트려 버린다. 그 신화는 인간 중심의 신화이며 이타주의의 신화이자 사랑의 신화이다. 이 책의 주장대로라면 그 신화에 다시 불이 붙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일산화탄소에서 에너지를 얻는 고세균 '아키아'의 발견은 우리의 불완전한 지식체계가 외계는커녕 지구 내부의 생명체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처량한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이런 식의 발견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아주 근본적인 목적만이 우리가, 혹은 어떤 생명이 존재하는 단 하나의 이유라는 걸 강조하고 마는 것이다.



2.

책의 주장에 도가 지나친 부분도 있다. 가령 남녀라는 성의 분화는 기생충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기생충을 많이 지닐수록 외모가 멋지게 진화하고, 암컷은 기생충을 가장 잘 물리칠 수 있을 듯한 수컷을 자신의 짝짓기 대상으로 고른다는 내용이 그렇다. 이 책의 주장을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외계인이 비밀리에 인간을 실험했는데, 그들은 이 실험에서 여성들이 남성 배우자를 고를 때 재산이 많은 사람들을 선호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재산이 많은 남성들은 어찌된 일인지 촌충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 촌충에 걸린 남성들은 먹이를 먹는 데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므로 두뇌 회전이 덜할 것이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집중력도 떨어져 재산을 모으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못했을 것이다. 즉 재산은 일종의 의무기록이라 할 수 있고, 거기에는 아마도 남성 유전자의 윤곽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결국 기생충의 유무가 여성의 배우자 선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이 과학자들의 가설과 주장을 이해를 해줄 필요는 있다. 우리는 오직 한 분야에만 매진한 사람들의 사고가 어떤 패러다임으로 움직이는지 잘 알고 있다. 당구에 빠진 사람들에겐 칠판이 당구대로 보이고 주식에 빠진 사람들에겐 온 세상의 움직임이 오직 주가의 흐름으로 결정되는 듯 보인다. 이성에 막 눈뜬 사람들은 오직 사랑만이 이 세상의 존재가치라 여겨 사랑의 성패에 자신의 목숨조차 쉽게 걸어버린다. 그러니 세상의 기원과 성의 분화, 우리들의 행동 성향을 모두 기생충과 연관짓고 보는 이 학자들의 움직임을 괴짜들의 꽉 막힌 시각으로 경멸하지는 말도록 하자. 그런 괴짜들이 때로 위대한 진척의 계기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법이다. 물론 '그런' 구석이 있다는 건 부인하지 않겠다. 그것도 조금 심하게. 전자 현미경으로 촬영한 기생충 사진을 보며 아름답다고 탄성을 지르는 이들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지만 이 정도의 변명은 남겨두도록 하자. "그래도 여전히 상상은 무죄다."(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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