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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우학당, 기억을 담은 집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7. 9. 11.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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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전통적인 돌담을 지나 작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당을 덮고 있는 잔디와 나무 몇 그루, 그리고 하얗게 칠한 단층 건물 세 채가 보였다. 밤나무와 후박나무, 동백나무 몇 그루가 서 있었고 카페로 꾸며진 건물 앞엔 장독대와 조그마한 석탑이 놓여 있었다. 테왁과 망사리를 비롯한 잠수복도 한쪽 벽에 걸려 있었다. 마중을 나온 주인 아주머니는 잔디를 미처 못 깎은 것이 미안하셨는지 연신 잔디 이야기를 하셨다. 아주머니께서 안내해 주신 방을 둘러본 후 불이 꺼진 북카페 앞을 서성이고 있는데 주인 아주머니께서 음료를 들러 카페에 들어오라 하셨다. 카페는 개시 전이었지만 우리를 위해 임시로 문을 열어주셨다.

좌식 형태로 꾸며져 있는 북카페에 앉아 아주머니와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제주도살이에 관한 것이었다. 원래 뭍사람이셨던 아주머니는 제주도 토박이인 바깥어른과 주변 제주도민이 살아가는 방식에 다소 이질감을 느끼시는 듯했다. 바깥어른과 함께 산 지, 그리고 제주도에 터를 잡은지 십 년도 넘으셨을 테지만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나 보다. 이런 성향을 단순히 뭍사람과 섬사람의 차이로, 남녀의 차이로 나눌 수는 없다. 우리는 자신이 가장 농밀하게 경험했던 것을 해석의 중심이 놓을 수밖에 없으니, 실제 움직임이 어떠하든 우리의 해는 여전히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지고 있는 것이다.

바깥어른께선 단청 그리는 일을 한다고 하셨다. 흔하지 않은 직업이었다. 북카페에 있는 책은 거의 모두 그분이 사신 거라 하셨다. 오래된 책도 있었고 비교적 최근에 출판된 책도 있었다. 하시는 일 때문인지 한옥과 건축에 관한 책이 꽤 보였는데 그래도 상당수는 문학이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일정 수준 이상의 세련된 문학서였다.

"그 사람, 문예창작과 출신이에요."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서재에서 <세계의 끝 여자친구> 혹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같은 책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문과 출신 정도는 되어야겠지. 널찍한 창밖엔 잘 꾸며진 정원이 있고 안쪽엔 좋은 책과 정갈한 탁자, 그리고 시절에 맞는 음료, 거기에 이야기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이곳에 있는 내내. 아주머니는 북카페 운영을 서서히 줄여가고 계신 듯했다. 좋은 곳인데, 하는 아쉬움이 일었다. 이처럼 담백하며 은은한 곳은 쉽게 알려지지 않는다. 주방 바닥에 앉아 천천히 수건을 접고 계신 아주머니의 모습에 까닭 모를 쓸쓸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바깥에 잠수복은 왜 걸려 있는 거에요?"

"시어머니께서 쓰시던 거에요. 해녀로 일하셨거든요."

시어머니의 물품이 숙소 외벽에 걸려 있어 의아해 하고 있었는데 그걸 눈치챈 아주머니께서 곧 이 집의 내력을 말씀해 주셨다. 숙소로 쓰고 있는 두 채의 건물 중 커다란 것은 과거 시어머니 가족이 살던 집이었고 그 앞의 작은 것은 남편과 자신이 결혼 후에 살던 집이라 했다. 지금 북카페로 쓰고 있는 건물은 예전엔 창고였다는 말씀도 하셨다. 건물 모양새를 찬찬히 살펴 보니 예전의 형태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게 보였다. 이 집의 매력은 바로 그 흔적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자연, 생태, 제주도의 본 모습과 조화를 이루던 옛집에서의 출발. 검은색 징크와 네온사인이 빛나는 간판을 자랑하기보다는 돌담을 경계로 제주도의 옛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한 숙소.

우학당의 매력은 외관뿐 아니라 내부에도 충만했다. 집의 내부 구조는 완전히 바뀐 상태였지만 옛스런 멋이 살아 있어 내외부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건물 내부 건축은 물론 인테리어 물품까지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어낸 듯했는데 수작업이 수반하곤 하는 약간의 빈틈이 제주 사람들의 인간미를 살리고 있었다. 바닥에도 손미장을 한 흔적이 보였다. 양회 바닥이 서서히 솟구쳤다가 다시 내려가는 능선마다 페인트가 벗겨져 추상적인 선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선은 일반 주택이라면 타박을 받을 만한 시공 흔적이었다. 하지만 장소가 달라지니 그도 하나의 멋으로 탈바꿈하였다. 내가 가장 감탄한 곳은 부엌이었다. 한 평도 되지 않을 듯한 작은 공간이었지만 그 소박함이 우리네 삶의 많은 흔적을 함축하고 있었다. 특히 아궁이처럼 꾸민 하부장이 내 시선을 끌었다. 난 연신 장의 문을 여닫으면서 아직도 제 모습을 갖추고 있는 현관 옆의 굴뚝과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구들장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려 애썼다. 

해가 수평선을 향해 기울고 있었다.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고자 카페에서 일어났다. 아주머니는 다음날 아침으로 들라며 우리에게 귤로 만든 잼과 바게트, 그리고 달걀을 건네주셨다. 예정에 없던 접객이었다. 그냥 들라며 내오셨던 레몬차와 아메리카노만으로는 마음이 충분치 않으셨나 보다. 떠나는 날,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복숭아 몇 개를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집을 나서니 거리엔 콩꼬투리 터지는 소리와 녹두 마당질 소리가 한창이었다. 이들 소리가 서서히 멀어지며 우학당을 떠나는 우리의 뒤를 배웅했다.

부엌을 중심으로 바라본 안쪽. 제주 김녕리, 우학당, 2017. 8.27.

북카페에서 바라본 마당. 왼쪽으로 커다란 밤나무가 보인다. 제주 김녕리, 우학당, 2017. 8.27.

주인 내외분, 아내 그리고 아이. 제주 김녕리, 우학당, 2017.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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