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따금 퇴계로 위쪽에 있는 진양상가를 찾아가곤 했다. 신규 검도 승단자들을 위해 검도장 나무 명패에 이름을 인쇄해야 했는데 그 작업을 해주는 인쇄소가 진양상가에 있었다. 다른 인쇄소도 많았지만 공단 근무를 하며 거래를 해오던 사이였기 때문에 개인적인 의뢰도 자연스럽게 이곳에 하게 되었고, 작업을 의뢰할 때마다 택배비를 아끼기 위해 직접 이곳에 찾아가게 된 것이다.
제일 처음 진양상가를 찾을 땐 인터넷에서 지도를 살펴보아야 했다. 그때 내가 눈여겨 보았던 것은 진양상가라는 건물의 다소 특이한 형태였다. 도로를 가로지르며 세로로 길게 세워져 있는 거대한 건물의 형상이 특이했는데 그 길이가 짧지 않아서 건물의 세로면이 거의 200미터에 달했다. 그 때문에 지도상에서 내가 찾아가려는 인쇄소가 정확히 어느 위치에 있는지 한참 찾아야 했고, 이렇게 알아보고 갔음에도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한참 동안 가게를 찾아 헤매야 했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런 비슷한 형태의 건물이 진양상가 위쪽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슷한 형태의 건물들이 도로와 청계천을 가로지르며 종로까지 쭉 이어져 있었으니, 그 길이가 거의 1km에 달했다. 이 일렬의 건물들은 북쪽으로 계속되어 종묘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 끝은 세운상가였다. 예전엔 세운상가가 아니라 현대상가가 북쪽 끝에 위치하여 도로 맞은편으로 종묘를 마주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철거되고 없다. 대신 그 자리에 세운초록띠 공원이 들어서 있었다.
2.
오래전,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 막바지, 현재의 진양상가, 세운상가, 인현상가 등(보통 이들을 통칭하여 세운상가라고 한다)이 위치한 곳은 거대한 공터였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본은 미국의 도쿄 대공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후 화재로 인한 시설물 피해를 줄이기 위해 당시 식민지였던 서울에 소개공지대, 즉 불이 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공터를 지정했다. 그 중 하나가 종묘에서 필동에 이르는 길이 1km, 폭 50m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일본은 그 지역을 깨끗이 밀어 소개도로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 도로가 6.25전쟁 이후 피난민들의 무허가 판잣집으로 뒤덮히게 되었으니 1966년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서울 각지에 형성되어 있던 판자촌을 해결하기 위한 일환으로 이 지역을 도심부 최초 재개발지역으로 선정하고, 국내 건축 1세대 스타인 김수근에게 설계를 의뢰하였다. 부여박물관 사건으로 절치부심하고 있던 김수근은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여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꾸민 거대한 모더니즘 건축물을 세웠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오늘날과 같다.
3.
진양상가를 비롯한 세운상가를 본 첫 느낌은 흉물스럽다는 것이었다. 왜 이런 밋밋한 거대한 건물이 도심의 양쪽을 부조화스럽게 가르며 세로로 길게 늘어서 있단 말인가? 주차장은 너무도 비좁았고 세운상가와 그 주변 건물들이 너무 가깝게 밀집하여 답답하게 느껴졌다. 지상의 보도 위에는 콘크리트로 만든 공중 보도가 마치 캐노피처럼 건물 끝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그 덕분에 지상으로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한낮에도 을씨년스러웠다. 떨어져 나간 페인트에 난잡하게 붙어 있는 형형색색의 간판들까지 가세하여 이 건물을 좌초된 유령선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스타 건축가라는 김수근의 설계라고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건축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찾아와 준공식에서 테이프를 자르던 새 시대의 세운상가는 건축가의 원 계획을 무시한 대리석 외장재 설치, 낡아버린 페인트칠, 무질서한 간판으로 스스로 좌초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을 동서로 나누며 잘못된 시작마저 암시하고 있었다. 당시 시대의 한계였고 모더니즘 건축의 한계였을까. 어쩌면 상업 시설 건축주들의 이익을 상대해야 했던 건축가의 한계였을까. 아니면 입주자들의 삶보다 자신의 슬로건을 이상화하려 했던 엘리트 건축가의 한계였을까. 인간이 은퇴라는 사건을 피해갈 수 없는 것처럼 이 건물 역시 마찬가지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명예로운 정년퇴직이 아니라 유형이라는 이름의 강제된 추방이었다.
그 뒤로도 몇 번 이곳을 찾아갔다. 여전히 세운상가는 그 일이 아니라면 다시 가보고 싶지 않은 곳으로 남아 있었다. 비좁은 주차장과 깨진 유리창 같은 건물 때문인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인상마저 어두워보였다. 그것은 건축의 위력을 나타내는 듯했다. 건축이 사회에 가할 수 있는 어두운 힘을. 그것은 바이온트 댐처럼 파괴적이진 않더라도 프루스트 아이고처럼 음산할 수 있었다. 난 손에 명패 몇 개를 쥐어든 채 재빨리 어두운 캐노피 아래를 뛰었다. 모르는 번호가 찍힌 전화벨이 울리고 수화기 너머로 당장 차 빼라는 거친 외침이 들려오기 전에.
4.
이제 세운상가는 멀리 위리안치당했던 대신이 다시 조정으로 돌아오듯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인 '다시세운' 프로젝트로 옛 영광을 재현하려 애쓰고 있다. 야심차게 기획했으나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 끊어버렸던 공중보행로의 재연결, 더 나아가 종묘에서 남산에 이르는 공중 산책로 추친, 김수근이 계획했으나 실행하지 못했던 옥상정원의 재설계. 무조건 없애는 것이 아닌, 보존에 기반한 재도약. 어디까지 돌아올 수 있을까? 혹은 더 올라설 수 있을까? 우리는 여전히 올라서길 꿈꾼다. 과거의 고통을 현재의 추억으로 말하듯, 그때의 주차난을 영웅담으로 얘기할 먼 미래를 위해. 아마도 그때까지, 여전히 지금처럼.
재개발 당시의 세운상가지구 조감도.건축도시정책정보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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