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닐라는 제과, 제빵, 음료뿐만 아니라 향수, 샴푸 등 다양한 제품에서 쓰이고 있는 향신료이다. 바닐라 아이스크림, 바닐라 크림빵, 바닐라 라떼, 바닐라향 방향제... 이처럼 쉽게 접할 수 있다 보니 바닐라가 무척 저렴하고 흔한 재료처럼 보이지만 바닐라는 실은 상당한 값이 나가는 매우 귀한 향신료이다. 상당한 양의 수작업을 요하는 오랜 작업 시간과 특유의 수분(pollination) 과정이 필요한 환경 때문에 바닐라는 생산량에 비해 소비량이 월등히 많고, 그 덕분에 사프란에 비견될 정도로 값진 대접을 받고 있다.
어쩌면 지금은 바닐라 가격이 사프란을 뛰어넘어섰을지도 모르겠다. 올 초 대형 사이클론이 전세계 바닐라 생산의 거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마다가스카르를 강타하여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바닐라 재배지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내가 구입한 바닐라는 6g에 3,000원이었다. 일반적으로 표기하는 100g당 가격으로 환산하면 무려 50,000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현재 여기에서 가격이 더 뛰었다면 (질이나 생산국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가격면에서는 사프란을 이미 앞질렀을 것이다.
이렇게 비싼 향신료이다 보니 바닐라는 거의 대부분 천연 재료가 아닌 인공의 합성착향료 형태로 쓰이고 있다. 즉 오늘날 '바닐라'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대부분의 제품은 천연 바닐라가 애초에 들어가지 않거나 미량만 들어가 있다. 나머지는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바닐라 '향'이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시중에서 천연 그대로인 바닐라의 맛과 향을 느끼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인공의 향이 실제 바닐라 향과 아무리 비슷하다 하더라도 천연 바닐라가 지닌 그대로의 욕구를 채워주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만들어진 향에 길들여져 있을 뿐, 도리어 진짜 바닐라 향을 맡아본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생각해보면 섬찟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닐라를 구매하여 집에서 직접 파우더와 슈가를 만든 건 그 때문이었다.
2.
바닐라 파우더와 바닐라 슈가(흔히 '바닐라 설탕')을 만들기 위해선 당연히 천연 바닐라가 필요하다. 흔히 '바닐라빈(vanilla bean)'이라고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바닐라가 콩과 식물인 것은 아니다. '커피빈'이나 '카카오빈'이 콩과에 속하지 않지만 '콩'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이유로 습관적으로 바닐라빈이라고 할 뿐이다.
이 바닐라가 있으면 파우더와 슈가뿐만 아니라 바닐라 익스트랙, 바닐라 럼도 만들 수 있다. 다만 익스트랙과 럼은 숙성시키는 시간(보통 두 달 이상)이 필요하기에 당장 쓰기엔 맞지 않았다. 그래서 바닐라 씨앗으로는 바로 쓸 파우더를 만들고 씨를 제거한 바닐라로는 바닐라 슈가를 만들기로 했다.
내가 구매한 것은 마다가스카르산 바닐라로, 검은 빛에 얇고 길쭉한 일반적인 모양을 하고 있었다. 타히티산 바닐라는 마다가스카르산 바닐라보다 더 두껍고 길쭉하며 그래서 씨앗도 마다가스카르산보다 더 많이 들어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타히티산을 마다가스카르산보다 더 고급인 것으로 평가하는 글들이 인터넷에 종종 보인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일방적 구분은 맞지 않다고 보아야겠다. 타히티산이 바닐라 씨앗을 더 많이 함유하고 있긴 하지만 정작 중요한 바닐린이 덜 들어 있기 때문이다. 1
3.
바닐라 관련하여 쉽게 접할 수 있는 인터넷상의 잘못된 내용 중 하나는 모 커피회사에서 판매하고 있는 바닐라 파우더가 '슈가 프리'에다가 천연 바닐라로 만들어져 건강에 매우 좋다는 정보이다. 특히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에 그런 정보가 퍼져 있어 정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실례로 '슈가 프리'인 그 바닐라 파우더에서 단맛이 나 놀랍다는 이야기들이 오가는 걸 볼 수 있었는데, '슈가 프리', 즉 무설탕 표기 제품은 단지 설탕을 넣지 않았을 뿐 액상과당이나 포도당, 올리고당 같은 다른 당류의 첨가 여부는 상관하지 않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해당 제품의 영어 성분표를 보면 'sugars 38g'이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으니 그 바닐라 파우더에서 단맛이 난다고 놀라서는 안 될 것이고, 또 '슈가 프리'라고 해도 거의 대부분 다른 당이나 인공감미료를 첨가하고 있으니 무설탕 제품을 건강과 쉽게 연관시켜서도 안 될 것이다. 게다가 이 제품은 인공바닐린으로 향을 더한 제품이라 천연 그대로의 향과도 거리가 있다. 아무래도 거의 시럽 형태로만 나오던 바닐라가 파우더 형태로 판매되면서 사람들에게 기대 이상의 환심을 사고 있는 듯하다.
4.
먼저 바닐라를 반으로 가른 뒤 안에 있는 씨앗을 조심스럽게 밖으로 빼냈다. 씨앗은 적당량의 설탕과 섞어 분쇄기로 갈아 파우더를 만들었고, 남은 껍질은 설탕에 잠기도록 섞은 뒤 밀봉했다. 설탕은 냄새 흡수에 탁월하기에 이렇게만 해도 바닐라향이 설탕에 오래 남게 된다. 설탕을 다 쓰고 나면 바닐라 껍질은 그대로 놔둔 채 다시 설탕만 채우면 된다. 3, 4개월쯤 지나 바닐라 껍질이 완전히 마르고 향도 줄어들면 럼에 담궈 '바닐라 럼'을 만들 예정이다.
이렇게 만든 바닐라 파우더로 바닐라 라떼를 만들어 보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하얀 우유 거품 위로 바닐라 특유의 까만 점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2 3
직접 만든 바닐라 파우더. 2017.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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